상설전시관2 한국인의 일상
봄
안녕하십니까?
국립민속박물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민족이 형성해 온 다양한 삶의 방식을 느끼고 배우고 체험해 볼 수 있는 생활사 박물관입니다. 한국의 민속 문화를 소개하는 상설전시관은 제1관 <한국인의 하루>, 제2관 <한국인의 일상>, 그리고 제3관 <한국인의 일생>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제2관 <한국인의 일상>관은 사계절 변화에 맞춰 살아온 조선 후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6월 이후 개편이 예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상이 개편 전 마지막으로 2관을 관람하실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설을 시작하겠습니다.
장승
2관 앞에 오시면 우선 여러 기의 장승이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을 입구마다 돌탑이나 이런 장승을 세웠습니다. 장승은 마을을 지키고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합니다. 여기 전시된 장승은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 입구에 세워져 있던 나무장승으로, 나무를 거꾸로 세워서 만든 것이 특징인데요. 자세히 보시면 몸통에 가람선신(伽藍善神), 외호선신(外護善神)이라고 적혀있어서 사찰을 지키는 장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솟대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시면 조선 후기 한 마을의 사계절 일상이 펼쳐집니다. 마을 어귀에 장승과 함께 솟대가 세워져 있네요. 장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 외에도 이렇게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막대기나 돌기둥 위에 얹은 신앙물입니다. 예로부터 새는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고 사람의 염원을 하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는데요. 솟대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경직도
벽면의 영상은 경직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경직도는 절기에 따라 농사를 짓고 베를 짜는 농민의 일상을 나타낸 그림인데요. 옛날에는 임금이나 관리들이 백성의 고단함을 알고 때마다 농사일을 장려하기 위해서 경직도를 가까이에 두었다고 합니다. 사계절의 생활 모습이 그려진 경직도를 통해 옛날 사람들의 일상을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경직도 영상 속 아이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한 해 일상을 따라가 보시겠습니다.
<봄>
봄은 24절기 중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농사비가 내린다는 곡우까지로 농작물의 씨를 뿌리는 시기입니다. 봄이 되면 나라에서는 농사에 힘쓸 것을 권하고, 마을에서는 일 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역에 따라 산신당을 짓거나 마을 제당에 국시말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동해안의 어촌에서는 해랑신을 동해의 신으로 여겨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는 곳은 달라도 풍요롭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았나봅니다.
순창지도
아래를 내려다보시면 바닥에 한반도 남부 도시, 순창의 옛 지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으로 덮여있습니다. 예로부터 풍수에서 ‘살기 좋은 터’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말합니다. 이는 산이 마을을 감싸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땔감이나 산나물도 얻고, 앞에 하천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거나 식수로도 이용할 수 있어서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마을은 이러한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했습니다.
농사장려
봄은 농절(農節)이라고 해서 국가적 차원에서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가집성』과『목민요람』같은 권농서를 제작하고,『농가월령가』라는 책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농가에서 매달 해야 할 일을 노래 가사로 만든 것입니다. 한글로 적혀있어서 한자를 모르는 농민들도 흥겹게 노래가사를 따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농사기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두레와 농악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럿이 함께하면 훨씬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죠? 농사는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특히 이앙법이 정착된 18세기 이후부터는 마을마다 두레라는 협동노동조직이 있었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간략한 신입 절차만 받으면 두레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요. 일반 서민들의 성인식으로 행해졌던 ‘들돌들기’입니다. 장골돌을 들어 올린 청년은 어른 품삯을 받게 되고, 반골돌을 들어 올린 청년은 일반 품삯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면에 커다란 용이 그려진 깃발이 보이시죠? 이것은 두렛일을 할 때 세우는 농기입니다. 구름과 비를 만드는 용과 풍요를 상징하는 잉어 등의 문양을 그려 넣어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습니다. 농기를 펄럭이고 그 뒤로 태평소,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를 치며 흥을 돋우는 풍물은 일꾼들의 피로도 덜고 손발을 맞춰 능률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거름주기
"똥 한 사발이 밥 한 사발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땅이 녹기 시작하면 먼저 논밭에 거름을 뿌려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게 하는데, 이때 뿌리는 거름으로는 주로 분뇨를 사용했습니다. 이곳에는 거름을 모으고 나를 때 쓰던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앞쪽의 전시물은 장군입니다. 집에 모아둔 분뇨를 바가지로 퍼 담은 후 논밭까지 운반할 때 사용했는데요. 분뇨를 옮기다 흘러넘치면 아주 난감했겠죠?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입구를 작게 만들고, 깨지지 말라고 삼끈으로 겉면을 감싸기도 했습니다.
봄갈이
땅에 거름을 주고 난 뒤에는 봄갈이를 해야 합니다. 겨울 동안 쓰지 않은 땅의 흙을 골고루 섞어줘야 땅이 기력을 회복하고 비옥한 상태가 됩니다. 중앙에 전시된 나무에 큰 삽이 달려 있는 것이 바로 쟁기입니다. 이것을 소에 메어 땅을 갈았습니다. 만약 소 대신 사람이 땅을 간다면 무려 9명의 일꾼들이 필요했다고 하니, 당시 소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전시된 유물은 소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신입니다. 그 옆에 소삼신은 소의 건강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삼금(三禁)’이라 하여 송금(松禁), 주금(酒禁), 우금(牛禁)이 있었습니다. 송금은 집 지을 때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것이고, 주금은 흉년에 곡식을 아끼려고 내린 금주령입니다. 특히 그 중 우금은 농사일에 소중한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듯 소는 농가의 가장 중요한 일꾼이자 재산이었습니다.
써레
그리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써레입니다. 커다란 빗처럼 생긴 날로 흙을 곱게 고르는 농기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써레질이 끝나면 논농사의 중요한 과정을 마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농가에서는 음식을 장만해 먹고 농악을 치면서 하루를 보내는 '써레시침'이라는 풍습을 즐겼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논에서 쓰는 것을 무논써레, 밭에서 쓰는 것을 마른써레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밭농사
옆 전시장에는 밭을 다지고 고르는데 필요한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왼쪽에 갈퀴처럼 생긴 농기구는 흙을 긁거나 흙덩이를 깰 때 사용하는 쇠스랑입니다. 뒤쪽 중앙에 굵은 밧줄이 묶인 커다란 삽이 보이시죠. 땅을 파고 그 흙을 멀리 던질 때 쓰는 가래입니다. 한 사람이 삽자루를 잡고 땅을 파면 서너 명의 사람들이 양쪽에 달린 줄을 힘껏 잡아당겨 파낸 흙을 멀리 던졌습니다. 이렇게 땅의 기력을 회복시키고 나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됩니다.
갯벌농사
여기부터는 스스로 살아 숨을 쉰다는 검은 들판, 갯벌입니다. 이곳에는 갯벌농사에 사용된 여러 가지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게는 수확한 어패류를 담아 지게처럼 어깨에 메고 나르는 도구입니다. 옆에는 갯지렁이를 잡는데 사용하는 쇠스랑도 있고, 굴을 따는데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조새도 있습니다. 여기 바구니처럼 생긴 조개방은 사람이나 소가 메고 끌면 진흙은 빠져나가고 조개만 남아 쉽게 수확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겠죠? 그래서 수확한 어패류를 운반하거나 채취할 때 이 갯벌썰매를 이용했습니다.
나물채취
봄이 되면 마을 주변의 산과 들은 각종 봄나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봄나물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주는 동시에 식량이 부족한 봄에 큰 도움이 되는 부식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마을의 여인들은 산과 들로 봄나물을 캐러 가고, 남자들은 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습니다. 중앙에 전시된 긴 꼬챙이가 보이시죠? 이것은 복령꼬챙이로 소나무 뿌리에 붙어 있는 복령이라는 버섯을 찾을 때, 이 긴 꼬챙이로 찔러서 버섯이 있고 없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구황
봄은 만물이 시작되는 시기인 동시에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미처 익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곡식이 바닥난 춘궁기에 사람들은 풀뿌리나 나무껍질 등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국가에서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서 백성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왔는데요. 그 중 하나가 책자를 편찬해 그들에게 구황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전시된『구황촬요』에는 솔잎으로 죽을 만들어 먹는 법과 굶주려 종기가 난 사람을 치료하는 법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후 18세기 대마도에서 들여온 고구마와 19세기 만주에서 들여온 감자가 구황식품으로 각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항아리는 절미통입니다. 이것은 쌀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평소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한 주먹씩 따로 모아두는 그릇입니다. 조금씩 아껴먹고 쉽게 꺼낼 수 없도록 입구를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좀도리는 절미통의 전라도 방언입니다. 이 전시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당시의 상황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농업은 1년을 주기로 농사가 이루어지는데요. 지금까지 농사의 시작점인 봄과 관련된 각종 농기구와 농경 관련 세시풍속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은 여름의 일상이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Permanent Exhibition 2 The Korean Way of Life
Spring
Hello, welcome to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is a life history museum that provides opportunities to experience the various ways of life that Koreans have had.
We have three permanent exhibitions introducing Korean folklore, respectively themed as ‘Korean Traditional Daily Life’, ‘The Korean Way of Life’, and ‘Korean Life Passages’.
The second exhibition, ‘The Korean Way of Life’, presents the life style of Koreans who liv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scheduled to be reorganized in June, so this video might be the last chance to look around this exhibition. If you are ready, let’s begin the tour.
Totem Poles
Several poles are standing in front of the second exhibition. They are jangseung, Korean totem poles. Erected at the entrance of a village, jangseung was believed to protect the village and keep evil and disease from harming people. The pair of jangseung standing here, built upside down, was used to protect Ssanggyesa temple in Hadong-gun, Gyeongsangnam-do, and then was later moved to this museum. A closer look enables us to notice two phrases written on the surface, ‘garamsunsin’ and ‘oehosunsin’, which mean that they are the guardians of the temple.
Poles Signifying Prayers for Good Harvests
From this gate, we enter a villag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see traditional life style in the four seasons. This is a sotdae which stands beside the jangseung at the entrance of the village. A sotdae was a pole with a bird statue made of wood or stone on its top. Traditionally, people believed the birds could deliver people’s prayers to God as well as connect humans to heaven. A sotdae represents a wish for the wellness of the village and good harvests. Standing together, sotdae and jangseung also served as signposts marking the borders of each village.
A Painting that Portrays Farming Life
On the wall, a video is playing of a traditional painting, a gyeongjik-do. A gyeongjik-do is an old painting that portrays activities, such as farming and weaving, in the four seasons. In the past, officials and kings kept these paintings close to remind themselves of how hard and exhausting the life of commoners was. We can see what daily life was like at a glimpse through this painting. Let’s follow these two children to see a year in the life of the villagers.
Spring
Spring is between the solar term of Ipchun, the beginning of the spring in the lunar calendar, and Gogu, the day when spring rain enriches the crops, and it was regarded as the sowing period.
Every spring, the government encouraged farmers and villagers to perform rites to village guardians praying for a good harvest. Depending on the region, the rite was held at a separately built shrine or at the village shrine with a figurine of a sacred horse. In seaside villages on the East Sea, people worshipped Haelangsin, the god of the East Sea, and held rites for abundant catches and calm seas. Even if they lived in different places, people had the same wish to live in abundance and peace.
Map of Sunchang
On the floor, there is an old map portraying Sunchang, a city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More than 70% of the Korean peninsula was covered by mountains. According to Feng Shui theory, the best place to establish a village was in an area where there was a river in front and a mountain behind. This is because a river gave people water for drinking and farming while a mountain offered firewood and wild vegetables and blocked cold wind. Most Korean villages were actually formed in places meeting these conditions.
Encouraging Farming
Since the spring was regarded as an important farming season, the government helped people concentrate on farming during this season. It published agricultural books and distributed a book named Nonggawolryeongga to encourage agriculture. 『Nonggawolryeongga』 contains the lyrics of a song that depicts monthly farming work. Because it was written in the Korean alphabet, even the common farmers who were illiterate in Chinese characters could understand and memorize the farming skills written in it.
Cooperative Farming Organization and Farmers’ Music
Any work can be done much faster if done by many people, can’t it? Farming was a very difficult task that required a large-scale labor force. So since the 18th century when rice transplantation became common, each village had a cooperative organization called a dure.
A dure was an open organization that young farmers could join after passing a simple membership test. Young farmers who succeeded at picking up a heavy rock, a janggoldol, were paid the adult wage, while those picking up a comparatively smaller stone, a bangoldol, were paid the average wage.
Do you see the flag with a big dragon at the center? It’s a farming flag representing a Dure. It has a dragon which was believed to control the rain and clouds and a carp representing abundance. Farmers’ bands playing taepyeongso, kkwaenggwari, janggu, sogo, gongs and drums, while flapping farming flags at the head of the procession played a role in reducing fatigue and increasing efficiency.
Topdressing
There was an old Korean saying back in the Joseon Dynasty that “Three buckets of cattle feces make for three sacks of rice.” When the frozen earth started to melt after winter, farmers cast natural fertilizers of feces and urine so the crops would grow well.
The tools for gathering and carrying fertilizer are displayed here. The bucket in the front row is a janggun. It was used for carrying feces to the field. It would have been very embarrassing to mistakenly spill it over the ground, wouldn’t it? To prevent this from happening, people made its mouth small and wrapped the surface with twine.
Spring Plowing
The next work to do after the topdressing was plowing. Farmers needed to plow the earth, which was not in use during the winter, to get it fertile and ready for farming. The farming tool with a large blade at the center is a plow. Connected to an ox, it plowed the earth. Back then, it was said that the workforce of one ox was equivalent to that of nine farmers, so you can imagine how much oxen were needed at that time. And on the left, there are ox-shoes to protect their hooves. Next to this, we can see so-samsin, a symbolic object wishing for the health and fecundity of the oxen.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prohibitions on three important things: pine trees, liquor, and oxen. The pine tree prohibition was a ban on logging pine trees indiscreetly when building houses, and the liquor prohibition forbade consumption of liquor during a lean year. As for the last prohibition, the slaughtering of oxen was strictly forbidden because they were invaluable workers as well as precious agricultural assets.
Harrow
On the right, there is a harrow, called sseore in Korea. It functioned as a rake that plowed the earth. Farmers regarded the end of harrowing work as the completion of an important process of rice farming. To celebrate it, people held a feast, where they enjoyed music and shared food all together, called sseore-sichim. In some regions, sseore was categorized according to the type of land it was used for -- munon-sseore for the paddy and mareun-sseore for the field.
Field Farming
We have a number of field farming tools in this showcase. This is a pitchfork. It was used to level the ground or to break up lumps of earth.
The big shovel chained with a thick rope called garae, is a tool for digging the earth and throwing it. When one man grabbed its handle and dug, three or four people pulled the ropes on both sides and threw the dug earth away. This process helped restore the productivity of soil before seeding.
Mud Flat Harvest
This section is about mud flats, the self-breathing black fields. In those showcases, there are various tools used for mud flat farming. A buge is a seafood basket for carrying harvested seafood. Next to the buge, there is a pitchfork for catching lugworms and josae for shucking oysters. This basket-shaped artifact is a jogaebang. When people or cattle drag it on a mud flat, the dirt drained out leaving only shellfish.
It is hard to walk on a mud flat, right? To make it easier, people used a mud flat sled to collect and carry shellfish.
Gathering Wild Vegetables
Spring was the season when mountains and fields turned green with wild vegetables. When spring came around, women headed to the fields to gather vegetables while men hiked the mountains picking medicinal herbs. Spring vegetables made good side dishes that restored appetites and kept people nourished during the spring when there was insufficient food.
Do you see a long skewer in the center? It’s called a bokryeong-kkochaengi. When people tried to find mushrooms, bokryeong, attached to the roots of pine trees, they poked the ground with this skewer to check where the mushrooms were.
Famine Relief
Spring was not only the season when everything began, but it was also the season of hunger when the previous year’s crops ran out before the new crops were ready. During the spring poverty, people had to endure hunger by eating grass roots or tree bark instead of grains.
The government sought ways to relieve famine and rescue people from starvation, one of which was to publish guide books about how to survive the hunger season. This book, 『Guhwangchwalyo』, introduces in detail how to cook pine-needle porridge and cure patients suffering from boils. Later, sweet potatoes imported from Tsushima island in 18th century and potatoes from Manchuria in 19th century became popular as famine relief crops.
This jar is a jeolmitong, meaning a ‘rice saving container’ in Korean. In the past, in preparation for the hunger season, Koreans saved a handful of rice here every time they cooked rice. People made the container’s mouth small so that only a small amount of rice could be used at a time and thereby save the rest. Jomdori, the word written on the left jar, is the southern dialect of jeolmitong. These artifacts help us learn about the wisdom of our ancestors and understand their situation during the hunger season.
Agriculture was done all year round. So far, we have learned about various farming tools used in the spring and seasonal customs related to agriculture. Next, we’re going to look at life in the summe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ank you.
Translator : Hyeongmin KO
Copy-editor : Jocelyn Wright, Changhyun OH
常设展馆2 韩国人的日常
春
大家好! 欢迎各位来到国立民俗博物馆。
国立民俗博物馆是一座生活史博物馆,在这里可以感受、学习和体验我们民族长期以来形成的不同生活方式。常设展馆主要介绍韩国的民俗文化,共由三个展馆组成,分别是第一馆《韩国人的一天》、第二馆《韩国人的日常》和第三馆《韩国人的一生》。这里是第二馆《韩国人的日常》,主要展示朝鲜后期人们顺应四季变化劳作、生活的面貌。该馆预计在6月之后进行更新,所以这个视频说不定是更新前最后一次观览第二馆的机会。那,现在开始解说。
长栍
来到第二馆入口,首先映入眼帘的是多尊长栍。韩国每个村子的入口处都建有石塔或长栍。长栍承担村庄守护神的职能,保护村庄免受杂鬼或疾病侵扰。这里展示的木制长栍原本立在庆尚南道河东郡双磎寺入口处,其特征是将树木头朝下倒着做成。仔细看的话,可以看到长栍躯干上写“伽蓝善神”、“外护善神”,由此可见这是守护寺庙的长栍。
鸟杆
进入馆内,展现在眼前的是朝鲜后期一个村庄一年四季的日常劳作和生活起居。村口立着长栍和鸟杆。长栍除了起到守护村庄的作用以外,还被用作标识村界的里程碑。鸟杆是一种将木鸟或石鸟安放在长杆或石柱上的信仰物。自古以来,鸟被当作沟通人与天上的媒介,人们相信鸟能将人的心愿传达到上天;而鸟杆蕴含着祈愿村落平安和年成丰收的意义。
耕织图
墙上投射的影像是耕织图,描绘农民遵循节气耕作、织布的日常生活场景。古时候国王和官吏为了了解百姓稼穑之苦,每每为了鼓励农耕,总把耕织图放在近前。耕织图描绘了农民一年四季的生活面貌,可以一目了然地看到古人的日常生活状况。下面就让我们跟随耕织图视频里的孩子们,去看看村民们一年的日常生活吧!
<春>
春天是二十四节气中立春至谷雨之间的时节,是农作物播种的时期。春天一到,国家督劝大家开始务农,村里为了祈求一年农事丰收,举行祭祀村落守护神的活动。根据地方的不同,有的建造山神堂祭祀,有的在祭堂里供奉一种木制或土制信仰物“国守马”,进行祭祀。东部沿海的渔村供奉东海的海神“海娘神”,祈求保佑海上的安全和渔业丰收。虽然生活的地方各不相同,但是人们想要过上富饶生活的愿望都是一样的。
淳昌地图
请看地面上展现出来的韩半岛南部城市淳昌的老地图。韩国70%以上的国土被山林覆盖。自古以来,所谓“风水宝地”指的便是背山临水的地形。后面靠着的山环护着村子,不仅可以抵御冬天凛冽的西北风,还提供了柴火和山野菜;村前流水可以用于耕作或饮用。韩国大部分的村庄都坐落在这种依山傍水的地形上,人们世世代代在那里安居乐业。
劝农
春天是农耕时节,国家做了很多努力鼓励农民专心务农。为此,国家制作了《农家集成》和《牧民要览》等劝农书,还制作了《农家月令歌》一书,予以推广。《农家月令歌》把农家每月要做的事情编辑成歌词。因为是用韩文写的,这样即使是不懂汉字的农民也可兴致勃勃地跟着歌词唱,自然而然地掌握农活技术。
互助组和农乐
无论做什么事,只要几个人齐心协力便能事半功倍。农事是一项需要集中投入大量劳动力的艰巨工作,因此在朝鲜后期,特别是18世纪普及插秧法以后,每个村子都有名为互助组的劳动合作组织。村里的青年们只要通过简单的入会手续便可加入互助组。普通百姓举行的成人礼是“抬石头”。抬起壮骨石(即大石头)的青年可以得到大人的工钱,抬起半骨石(即小石头)的青年只能得到一般的工钱。
看到正面画着巨龙的旗帜了吧? 这是互助组干活儿时打的农旗。旗面上画的呼风唤雨的龙和象征丰饶的鲤鱼等图案,表达祈愿丰收的愿望。前面旗帜飘扬,后边的农乐风物队吹起太平萧,打着小锣和锣,敲响长鼓、鼓和小鼓等,大家兴致高昂,情绪热烈,不仅减轻了劳动者的疲劳,还起到了协调手脚,提高劳动效率的作用。
施肥
有句古话说“一碗屎,一碗饭”。土地经冬开始融化后,需要先在农田里撒上肥料,这样农作物才能顺利生长,这时所施的肥料主要是粪便。这里展示着收集肥料和施肥时用的农具。前面的展品是横缶。将家里积攒的粪便用瓢舀进去,然后运送到农田时使用。如果粪便在运输过程中溢出,肯定很难堪!为了防止这种情况发生,横缶的口做得很小,外面还用麻绳包起来,以免打碎。
春耕
给土地施完肥以后,就开始春耕。一个冬天都没有动过的土壤要均匀翻松后,才能恢复元气,才会肥沃。这里正中央展示的木柄上绑着大铁铲的农具就是犁,通常用牛拉着犁地。如果用人力代替牛耕,则至少需要9个人的劳力,可想而知牛的力量有多大。左侧展示的文物是为了保护牛的蹄子制作的“牛鞋”,旁边展示的牛三神具有祈愿牛健康多产的意义。
朝鲜时代有“三禁”,指的是松禁、酒禁和牛禁。松禁是盖房子的时候不许乱砍松树。酒禁是荒年期间为了节省粮食不许酿酒。牛禁尤为特殊,指不许随便屠宰对农事而言非常珍贵的耕牛。由此可知,牛是农家最重要的劳动力和财产。
耖耙
右边看到的农具是耖耙。它像一把大梳子一样,用梳齿般的耙刃把地翻平耙细。过去人们把耙地视为完成种田的一个重要步骤。因此,干完耙活当天有“洗耙子”的风俗,农家置备好食物,一边尽情享用,一边敲锣打鼓,热热闹闹地度过一天。一些地方分别把稻田里用的耙称为水田耙,旱田里用的耙称为旱田耙。
耕种旱田
旁边展场展示着翻整旱田,平整土地时需要的农具。左侧像一个巨大叉子的农具是铁耙,用它翻挖土层或把土块敲碎。后面的中间能看到绑着粗绳的大木铲吧? 这是挖地后往远处抛土时使用的铁锹。一个人抓住锹的把儿挖土,三四个人抓住两边拴着的绳子,一起把挖出来的土扔得远远的。经过这样的翻整,土地恢复元气以后就可以正式开始种庄稼了。
滩涂劳作
从这里开始便是像生命体一样呼吸着的黑色田野——滩涂。这里展示着用于滩涂劳作的各种工具。背篓是装收获的鱼贝类海产品的工具,可以把它像背架一样扛在肩上搬运移动。旁边有用来抓沙蚕(即海蚯蚓)用的耙子,还有用来挖牡蛎的蛎子刀,是一种一头尖尖的铁钩。这个形如篮子的工具叫蛤蜊房,人或牛扛在背上拖着走的时候淤泥会自动漏出,里面只剩下贝壳,便于采集。另外,在泥滩上脚很容易陷下去,行走不便。所以搬运或采集鱼贝类时,需要使用这种滩涂爬犁——泥橇。
采摘野菜
春天来临,村子周围的山野便长满了各种野菜。春天的野菜不但能帮助人们找回冬天失去的胃口,而且也可充当副食,对度过春荒大有助益。一到春天,村里的女人们就去山上和野地里挖野菜,男人们则上山挖草药。看到中间展示的长扦子了吧?这是一根茯苓扦,可用它寻找贴在松树根上的蘑菇——茯苓,用这根长长的扦子戳一戳,就可确定有没有茯苓。
救荒
春天是万物复苏的时节,同时也是头年收获的粮食消耗殆尽,新粮还没成熟的时候,很多人因饥饿而陷入困境。在粮食见底的春荒期,人们不得不靠吃草根树皮艰难度荒。同时,国家也利用各种方法帮助百姓度过俗称“大麦岭”的春荒难关。其中一个办法就是编纂册子传授救荒的办法。这里展示的《救荒撮要》详细介绍了用松针熬粥的方法,以及如何治疗因饥饿而长疮的人。此后,18世纪从对马岛引进红薯,19世纪从满洲引进土豆,这些都成为深受欢迎的救荒食品。
这个坛子是节米桶,平时每次做饭的时候都抓一把米放进这口坛子存着,以备粮荒。为了一点一点省着吃,防止轻易取出,这个坛的口故意做得特别小。旁边的坛子上写的是全罗道方言中的“节米桶”一词。通过这些展品,我们可以了解到韩民族祖先们的生活智慧和当时的生活状况。
农业是以一年为周期来安排农事的。到目前为止,我们了解了与春季开耕相关的各种农具,以及和农耕相关的岁时风俗。接下来是夏天的日常生活。谢谢大家的观看。
中文翻译 : 韩贞姬
中文编辑 : 庞建春
常設展示室2 韓国人の日常
春
韓国国立民俗博物館へようこそ!
国立民俗博物館は、韓国人が築いてきた様々な生活文化を感じ、学び、体験することができる生活史博物館です。韓国の民俗文化を紹介する常設展示室は、第1室<韓国人の一日>、第2室<韓国人の日常>、第3室<韓国人の一生>で構成されています。第2室<韓国人の日常>では、四季の変化に合わせて生きてきた朝鮮時代後期の人々の生活文化を窺うことができます。ただしこの第2室は、2020年6月以降、リニューアル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もしかしたらこの動画が、リニューアル前の第2室をご覧いただける最後のチャンスかもしれません。
それでは、これから解説を始めさせていただきます。
チャンスン
第2室入口の前に、複数のチャンスンがあります。韓国人は村の入り口に石積みの塔やチャンスンを立てました。チャンスンは村を守り、悪鬼や疾病から村人を保護する守護神的な役割を持っています。ここに立っているチャンスンは、慶尚南道(キョンサンナムド)河東(ハドン)郡にある双磎寺(サンゲサ)の入口に立っていた木製のチャンスンで、木を逆さまにして、根元の部分をチャンスンの頭にしたのが特徴です。よく見ると「伽藍善神・外護善神」と書いてあり、お寺を守るチャンスンだと分かります。
ソッテ
展示室に入ると、朝鮮時代後期のある村における四季の日常が目に入ってきます。村の入り口にチャンスンと共にソッテが立ててあります。チャンスンは守護神の役割の他にも、村の境を示す標識として使われることがありました。ソッテは、木や石で作った鳥を竿や石柱の上に乗せたものです。かつて鳥は、天と人を繋ぎ、人の願いを天に届けてくれる存在だと思われていました。このようなソッテには、村の無事と豊作を祈る意味が込められています。
耕織図
壁面には「耕織図」をアニメーション化した映像が映されています。耕織図は暦に合わせて農業を営み、機織りをする農民の日常を表した絵です。昔は、王や官吏が民の苦労を察し、農業を振興・奨励するために、耕織図を身近に置いて親しんだといいます。四季の生活の様子が描かれている耕織図を通して、昔の人々の日常を窺うことができます。耕織図の映像の中に出てくる子どもたちと一緒に、村人の一年の暮らしを見てみましょう。
<春>
春は二十四節気のうち、春の始まりを告げる立春から、穀物の成長を助ける雨が降るという穀雨までの期間で、種まきが行われる時期です。春になると、国は農業に力を入れることを勧め、村では守護神に対する祭祀を執り行い、豊作を祈りました。地域ごとに、山神堂(サンシンダン)を立てたり、村の祠堂にククシマル(神様が行き来する時に乗るという馬)を奉安したりして祭祀を執り行いました。東海岸の漁村では、海娘神(ヘランシン)を東海の神様として祀り、安全と豊漁を祈願しました。住む所は違っても、豊かに暮らしたいという人々の願いは同じだったようです。
淳昌の地図
下をご覧ください。床に、韓国の南部に位置する淳昌(スンチャン)の古地図が広がっています。韓国は国土の70%以上が山です。古くから風水の理論で住みやすい場所とされたのは、背後に山があり前方に川が流れる「背山臨水」の土地です。背後の山は冬の厳しい北西風を防ぎ、生活に必要な薪や山菜も与えてくれます。前の川は、農業用水や飲み水として利用されます。韓国のほとんどの村は、このような背山臨水の土地に位置しており、人々はその中で暮らしていました。
農業の推奨
春を迎え「農節」ともいわれる農業の季節が到来すると、国は全国に対して農業に力を入れるよう勧めました。農業の振興・奨励のために、『農家集成』『牧民要覧』のような勧農書や『農家月令歌』などを編纂して普及させました。『農家月令歌』は、農家で毎月すべきことを歌詞にしたものです。ハングルで書かれ、漢字が分からない農民も楽しく歌いながら自然に農業技術を覚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
トゥレ(結い)と農楽
どのような仕事でも大勢で一緒にすると、より早く終わらせることができます。農業は多くの労働力を集約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朝鮮後期、特に田植えが全国的に定着した18世紀以降、村ごとにトゥレ(結い)という協同労働組織が設けられました。村の青年たちは、簡単な手続きでトゥレ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庶民男性の成人式として行われたのが石担ぎです。大きな石を持ち上げた青年は大人の賃金を、小さな石しか持ち上げられなかった青年は一般の賃金をもらいました。
正面に大きな龍の描かれた旗が見えますね。これはトゥレで農作業をする時に立てる農旗です。雲と雨をもたらす龍と、豊かさを象徴する鯉などを描いて豊作を祈願しました。農旗を先頭に立てて、その後ろでテピョンソ(太平簫)・ケンガリ(小型の銅鑼)・チン(銅鑼)・チャング(杖鼓)・プク(太鼓)・ソゴ(小鼓)を演奏して盛り上げる「プンムル(風物)」は、仕事の疲れを癒し、また、トゥレの団結を図り仕事の効率を上げる役割を持っていました。
施肥
「糞一杯はご飯一杯と同じ」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春になり、凍った地面が溶けはじめると、田畑に肥やしを撒き、農作物がよく育つ土づくりをします。肥やしとして主に使われたのが糞尿です。ここには、肥やしをかき集め、運ぶ時に使われた農機具が展示されています。この展示品はチャングンといいます。集めておいた糞尿をチャングンに入れて田畑まで運びました。運搬中に糞尿がこぼれると困るので、それを防ぐためにチャングンの口を小さく作り、割れないように全体を麻紐で巻くこともありました。
春耕
土地に肥やしを撒いた後、春耕を行います。冬の間眠っていた土地を耕すことで、地力が高まり肥沃な状態になります。中央に展示されている、木製の本体にシャベルのような刃が付いている農機具は唐鋤(犂)です。牛に引かせて田畑を耕すのに用いられました。もし、牛の代わりに人が耕すとすれば、なんと9人の人手が必要だったそうで、牛がどれほど大きな助けになったのかが分かります。その左側にある展示品は、牛の蹄を保護するために作られた牛の履物です。その隣にある牛の三神(産神)は、牛の健康と多産を祈願する意味があります。
朝鮮時代には、松禁・酒禁・牛禁という三つの禁令(三禁)が下されました。建物を造る時、松の木をむやみに切ることを禁じるのが松禁であり、酒禁は、凶作の時に穀物の消費を控えさせるための禁酒令です。牛禁は、農作業において大事な牛をやたらに屠殺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ように、牛は農家のもっとも重要な働き者であり財産でした。
ソレ(馬鍬)
右側に見える展示品はソレ(馬鍬)です。大きい櫛のような形の刃で土を掻き均す農機具です。当時の人たちは、代搔きが終わると、水田作において重要な作業を終えたと考えました。それで農家では、「ソレシチム」といい、美味しいものを食べて農楽を演奏しながら一日を楽しく過ごす風習がありました。一部の地域では、水田で使うソレを「ムノンソレ」、畑で使うソレを「マルンソレ」と呼ぶこともありました。
畑作
ここには畑の地を掻き均すのに用いられる農機具があります。左側の熊手のようなものは、土を掻いたり土の塊をこなす時に使われるセスラン(熊手鍬)です。後ろの方に、太い綱が掛けられている大きなシャベルが見えますね。土を掘り起し、その土を投げ飛ばす用途に使われるカレ(鋤)です。一人が柄を握って土を掘ると、3~4人が両側に付いている綱を引っ張り、掘った土を遠くへ投げました。このような作業を通して地力を回復させると、本格的な農作業が始まります。
干潟漁
ここからは生命の宝庫である黒い野原、干潟です。ここには干潟漁に使われる様々な道具が展示されています。プゲは収穫した魚介類を入れ、背負って運ぶ道具です。隣に、ゴカイを捕まえるセスラン(熊手鍬)があり、牡蠣を獲る時に使う刃先の尖ったチョセもあります。籠のような形のチョゲバン(貝獲り鋤簾)は、人や牛が引っ張ると、泥が落ちて貝だけ収穫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足がずぶずぶ嵌り込む干潟で体を動かすのは容易ではありません。そこで、干潟ソリに乗って移動しながら魚介類を獲り、陸まで運搬しました。
山菜採取
春になると、村の山や野原は色々な春のナムル(若菜)で覆われます。春のナムルは、冬の間失った食欲を回復してくれると同時に、食糧が足りない春に、副食として大きな助けになりました。女性たちはナムルを採りに野外へ出かけ、男性たちは薬草を採りに山へ行きました。中央に展示されている長い棒が見えますね。これは茯苓という茸を採るのに使う突き棒です。松の根に付いている茯苓を探す時、この棒で刺してみて茯苓があるかどうかを確認しました。
救荒
春は万物が蘇る季節ですが、一方、前年に収穫した穀物は底をつき、新穀は未だ熟さず、多くの人々が飢えで苦労する時期でもありました。このような春窮期には、草の根や木の皮などを食べて飢えをしのぎました。春の端境期を無事に乗り切れるよう、国も様々な工夫をしました。その一つが、書籍を発行し、飢饉に見舞われた時の対応方法を国民に周知することでした。ここに展示されている『救荒撮要』には、松葉でお粥を作って食べる方法や、飢えて腫れ物ができた人を治療する方法などが詳しく紹介されています。その後18世紀に対馬から入ってきたサツマイモと、19世紀に満州から入ってきたジャガイモは、救荒食品として注目されました。
この壺は「節米桶」といいます。これは、お米が足りない時に備え、普段ご飯を炊く前、一つかみのお米を取っておく壺です。お米を節約するため、壺から簡単に取り出せないように口を小さくしたそうです。壺に書いてある「チョムドリ」は、節米桶の全羅道(チョルラド)方言です。これらの展示品を通し、先祖の生活の知恵や当時の状況まで窺うことができます。
農業は一年周期で繰り返されます。ここでは、一年の農作業の始まりである春に使われる農機具と農耕関連の風習などについてご覧いただきました。この後は、夏の日常をご紹介します。ご観覧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日本語翻訳 河閔恵(ハ・ミンヘ)
翻訳監修 中村克哉(なかむら かつ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