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출생, 교육>
안녕하십니까? 국립민속박물관은 조선시대 후기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의 삶을 소개하는 생활사 박물관입니다. 크게 세 개의 상설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 3관 <한국인의 일생>은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일생의례를 전시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해설을 시작하겠습니다.
신방
신방은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공간입니다. 벽에는 부부화합을 상징하는 꽃과 나비 그림의 화접도 병풍이 영상으로 보이고, 바닥에는 원앙처럼 부부가 함께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원앙금침을 깔았습니다. 조선시대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 출산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신부는 이를 기원하면서 기자도끼를 차거나, 열쇠패와 수젓집 등에 부귀다남 ․ 자손번창 등의 글씨를 새겼습니다. 특히 여러 개의 별전을 엮은 열쇠패는 친정어머니가 딸이 시집갈 때, 자식과 재물의 복을 누리라는 의미로 혼수함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신부는 이것을 방의 장이나 농 등에 걸어놓고 집안의 평안과 수복을 기원하였습니다.
삼신
우리 조상들의 출산에 대한 염원은 삼신(三神)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삼신은 아이를 점지해 주고 출산 후에는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돌봐주는 집안에 모시는 가신(家神)으로, 산신(産神)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출산을 하면 방안 윗목에 출산을 도와준 삼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삼신상을 올리고 아이가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빌었습니다. 또한 출산 전에는 삼신상에 한지를 깔고 쌀·미역·정화수 등을 올렸고, 출산 직후에는 상 위의 쌀과 미역을 이용해 산모에게 밥과 미역국을 만들어 먹였습니다. 벽 위쪽에 올려져 있는 것은 삼신을 모시는‘삼신단지’입니다. 단지 안에 쌀을 넣고 한지로 덮어서 안방의 시렁 위에 올려놓았는데요. 해가 바뀌면 단지 안의 쌀을 꺼내어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 나눠먹고, 그 안을 다시 새 쌀로 채웠습니다.
금줄
위를 보시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대문에 걸어 아이의 탄생을 알리고, 나쁜 잡귀나 부정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금줄이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금줄은 새끼를 왼쪽으로 꼬아,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물건을 꽂았습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붉은 고추와 숯을 끼웠는데, 이는 잡귀와 부정을 물리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솔잎과 숯을 꽂았는데, 솔잎은 아이가 바느질을 잘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3주(21일)가 지나면 금줄을 걷었습니다.
태실
태실(胎室)은 왕실이나 양반 상류층에서 아이의 태를 태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한 곳입니다. 예로부터 아이의 태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출산 후에도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태를 처리하는 방법은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는데요. 왕실과 양반 상류층에서는 좋은날을 가려서 아이의 태를 태항아리에 넣어 산에 묻었고, 민간에서는 태를 왕겨 속에 묻어 태우거나 깨끗한 곳에 묻었습니다. 특히 왕실의 경우, 태의 기운이 국운과 연결된다고 여겨서 돌로 태실을 만들어 산에 묻고 그 산을 태실이 있는 봉우리란 의미로‘태봉산’이라 하여 특별히 관리하였습니다.
돌
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되는 날, 처음 맞이하는 생일인 돌이 되었습니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에는 아이가 무사히 첫 생일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고 장차 잘 자라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특별한 날, 어른들은 아이에게 액을 막고 장수를 염원하는 뜻을 담아서 색동으로 만든 오방장두루마기와 색동저고리를 입혔습니다. 돌상에는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는 백설기와 실타래 이외에 돌잡이 물건을 올려놓고 아이의 장래를 점쳤습니다. 남자아이가 돈이나 곡식을 잡으면 장차 부자가 되고, 책·붓을 잡으면 문관, 활·화살을 잡으면 무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아이는 실패나 가위를 잡으면 바느질을 잘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양반가에서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가 되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부모들은 그 마음을 담아 돌상 뒤에 이처럼 책이 한가득 그려진 책가도 병풍을 세웠습니다. 또한 돌상 위에는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을 올려놓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천명이 한 글자씩 써서 완성한 것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지인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부탁하여 한 글자씩 받아 만들었습니다. 이는 천 사람의 지혜가 아이에게 전해져 장차 학문에 크게 성공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윤리교육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인 윤리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유교덕목인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는 각각 효도·형제와 이웃 간의 우애·충성·신의·예절·의리·청렴·부끄러움을 뜻하는 글자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풍그림의 여덟 글자는 각각의 고사가 있는데요. 효(孝)자에는 죽순·잉어·부채·가야금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 죽순에는‘맹종곡죽(孟宗哭竹)’이라는 고사가 있는데요. 오나라 관리인 맹종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에 걸려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맹종은 대나무밭으로 달려가 평소 어머니가 즐겨 드시는 죽순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추운 겨울날 아무리 찾아도 죽순을 찾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 생각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버렸습니다. 그 때 놀랍게도 눈밭에서 작은 죽순이 올라왔고, 맹종은 이것으로 죽순탕을 끓여 어머니께 드렸다고 합니다. 사대부들은 이처럼 유교덕목을‘문자도 병풍’으로 꾸며 평생 따라야 할 가치로 삼았습니다. 국가에서도 효자·열녀를 표창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윤리서를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습니다. 특히 그림이 포함된 윤리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잠시 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문방사우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학용품으로 이어지겠죠. 당시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학용품을 글방이나 서재에 갖춰놓는 물건이란 의미로 문방구(文房具)라고 하였습니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사회에서 종이·붓·먹·벼루는 사대부들이 항상 곁에 두어야 할 네 벗‘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네 개의 진열장에 이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분판이나 사판으로 글쓰는 연습을 했습니다. 분판은 넓적한 판에 분을 기름에 개어 발라서 만들었고, 사판은 넓적한 나무상자에 고운 모래를 채워서 만들었습니다. 죽책은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을 댓살에 적어 담아놓은 경서통으로, 경전을 암기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필묵통은 붓과 먹물을 휴대하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원구형 먹통에 긴 손잡이가 달려있는 형태인데, 손잡이는 붓을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가 비어 있습니다. 이단 먹통의 아랫단 윗면에는 한자로‘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가 새겨져 있고, 먹통과 손잡이가 연결된 부분 아래쪽에는 벽 등에 매달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습니다.
책가도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학문적 자세나 유교적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이처럼 사랑방에 문방구나 고동기를 그린‘책가도(冊架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마치 서재처럼 늘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여기 여러 권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명나라 사람 판리번[范立本]
이 중국 고전 가운데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편찬한 아동용 교재로, 마음을 맑게 하는 보물 같은 귀중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을 수록한 『논어(論語)』를 한글로 풀이한 대표적인 유교 경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잠시 전에 언급했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입니다. 조선 4대 왕 세종 때 설순(偰循, ?~1435) 등이 왕명에 따라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즉‘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한 윤리 교육서입니다.
서당
서당은 어린 남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로, 선생님인 훈장과 학생인 학도로 구성됩니다. 학도는 대개 6~7세에 입학하여 14~15세에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 보시는 것처럼, 관례를 치룬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서당에서는 나이가 많고 성적이 우수한 자를 학생장으로 세워‘접장’이라고 불렀는데요. 만약 이 서당에도 접장이 있었다면 이 남성이 접장일 가능성이 크겠죠. 당시 훈장은 학도들의 수준에 따라 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서당에서는 한자의 뜻과 음을 익히기 위한 『천자문(千字文)』에서부터 『논어(論語)』 등 유교경전에 이르기까지 한문 교재를 암송하거나 글 쓰는 연습을 했습니다. 오른쪽 학생들 책 옆에는 좁고 긴 검은 종이가 놓여 있는데요. 이것은‘서산(書算)’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책의 내용을 반복하여 외우는 학습법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이나 문장을 읽고 외운 횟수를 서산 겉면에 낸 홈을 접거나 펴는 방식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서당을 마치면 학생들은 유교적 덕목을 익히고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중급 교육기관인 서원이나 향교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사서는『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은『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을 이릅니다. 한편 당시 여성들은 집안에서 한글교육을 통해 문자를 익혀서 편지왕래를 할 수 있었고, 한글번역서를 통해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지식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아가는 사회적 활동은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여성들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천문지리교육
조선시대에는 천문지리교육도 이루어졌는데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기 때문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체의 운행 이치를 배우고, 별자리가 그려진 천문도나 해시계를 통해 24절기와 시간을 관측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도로, 하늘의 적도를 12분야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놓은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돌에 새겨진 천문도를 종이에 그대로 떠내거나 베껴서 별자리의 위치를 익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천문학은‘제왕학(帝王學)’이라고도 불렀는데요. 이는 왕이 하늘의 뜻을 읽어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농사의 시기를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청구남승도(靑邱覽勝圖)’는 당시 사람들의 지리에 대한 높은 이해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가로 세로 빽빽하게 글자가 채워진 이 그림을 펼쳐놓고, 오늘날 주사위와 비슷한 ‘윤목’을 던져서 나온 수에 따라 전국의 산·정자·절 등 명승지를 유람하며 지명을 익히는‘승람도놀이’를 하였습니다. 이 놀이는 먼저 시인·미인·어부·스님·도사 등 여행객(말)을 정하고, 서울을 떠나서 다시 서울로 가장 빨리 돌아오는 여행객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양반들의 출생부터 교육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성인이 된 양반들의 삶이 이어집니다.
Permanent Exhibition 3 Korean Life Passages
Birth · Education
Hello, welcome to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is a life history museum that introduces the ways of living of Korean people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consists of three permanent exhibitions, among which the third exhibition, Korean Life Passages, presents the important moments that a person goes through from birth to death.
Shall we begin the tour?
Bridal Rooms
This is a bridal room where the newlyweds spent their honeymoon after their wedding ceremony. The video on the wall is about the painting of flowers and butterflies which symbolized a happy marriage. On the floor, there is bedding on which pairs of lovebirds are embroidered. A pair of lovebirds represented the love between couples. In the Joseon Dynasty, it was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to continue the patrilineage. So, to have many sons, the brides carried a gijadokki, an ax-shaped ornament which symbolized sons, or they engraved the Chinese characters for many sons (多男), wealth (富), or prosperity (貴) on their spoon bags. Especially, this keyholder with special coins was a marriage gift given from mothers to daughters in the hope of fecundity and wealth. The daughters hung this in their closets and wished for the peace and prosperity of their families.
God of Childbirth
Samsin, the god of childbirth, represented the desire for offspring. Samsin was regarded as the deity of a family who controlled the birth of a baby and cared for the mothers and babies after their birth. People in traditional society offered tables to Samsin to thank Samsin and wish for the wellness of their babies. Before giving birth, the table was set up with hanji (Korean paper), rice, seaweed, and water. After a baby was born, family members made seaweed soup to treat the mother.
There is a samsin-danji, a pot offered to Samsin, on the top shelf. People put raw rice into it, covered it with hanji, and stored it on the shelf. When the new year came, they cooked the raw rice which had been kept in the pot and shared it with family members. The pot was filled with new raw rice afterward.
Straw Ropes to Ward Off Evil Spirits
We can see three straw ropes hung across the ceiling. They are geumjul, the taboo ropes to ward off evil spirits and announce the birth of a baby to neighbors. Its figure was slightly different from region to region, but in most cases, people made it by twisting straw counterclockwise and putting a few symbolic things in it. When a baby boy was born, for instance, red peppers and charcoals were put in, while pine branches and charcoals were inserted when a baby girl was born. The red peppers and charcoals were believed to prevent evil spirits from entering the house, and the pine branches symbolized sewing needles. 21 days after the birth of a baby, people removed the geumjul from their gates.
Placenta Chambers
A placenta chamber is a place where the placenta of a baby was kept. According to Korean folk culture, a placenta contained a baby’s vital energy, and therefore it had to be preserved with great care.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way of handling the placenta depending on the social status of the family. Commoners burned them with chaffs or buried them in a clean place, while the royal family and the nobility put their babies’ placentas in placenta jars and buried them in a mountain. Especially, the placenta of a royal baby was believed to represent the fate of a country, so people built a placenta chamber with stones in a mountain. The mountains where placenta chambers were located were called taebongsan and were carefully maintained.
The First Birthday
Dol referred to the first birthday of a baby. Back in traditional society, when the infant mortality rate was high, people held parties on the baby’s first birthday to celebrate a safe first year and pray for the baby’s health. On this special day, family members dressed the baby in a jacket with sleeves with multicolored stripes and a coat of five colors in the hope of a life safe from evils.
On the party table, people set beakseolgi, white rice cake, and a ball of yarn to wish for longevity. And they also set several symbolic objects on the table for the baby to choose from. This old custom called the first-birthday-pick was believed to predict the future of the baby: money or grains meant wealth, a book or a writing brush meant becoming a government official, and an arrow or a bow meant becoming a military officer. If a girl picked a spool or scissors, it meant she would become a good housewife who was adept at sewing.
In the Joseon Dynasty, the nobility considered passing state examinations and becoming a government official the most honorable thing one could do in one’s life. So, noble parents set up this folding screen, where a lot of books and bookshelves were painted, in the party hall.
Shall we have a look at this book? This book was a textbook for learning Chinese characters. In this book, a thousand characters were written. When a baby boy was born, his father and grandfather visited a thousand of their acquaintances to ask each of them to write a character in this book. This represented the hope that the wisdom of a thousand people would be passed down to the child and that he would succeed in his studies in the future.
Ethics Education
One of the goals of the kings and government 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was to establish a moral society through ethics education based on Samgang Oryun, the three fundamental principles and five moral disciplines. The Samgang Oryun was based on the 8 core virtues: filial piety, brotherly affection, loyalty, sincerity, propriety, righteousness, integrity, and self-reflection.
There are 8 pieces of paintings on this folding screen, each of which consists of a Chinese character and a few objects symbolizing each character. For example, in the first painting, we can see the Chinese character 孝 (filial piety) in the center, and around this, bamboo shoots, a carp, a fan, and a zither (a string instrument). The bamboo shoots represented a heart touching story: In ancient China, there was a man named Maengjong, who loved his mother very much. One day, his mother got so sick that she couldn't eat anything. Maengjong went to the bamboo grove to find bamboo shoots, one of her favorite foods, but he failed to find them because it was winter. He was so disappointed that he burst into tears. Then, out of nowhere, a small bamboo shoot popped up from the ground, and he made soup with it to treat his mother.
Likewise, the other objects in these paintings represented meaningful stories related to each Chinese character respectively. The Confucians set up these folding screens in their rooms to always keep these virtues in mind. The Joseon government as well encouraged people to practice moral virtues in their daily lives by giving official commendations to exemplary people and distributing the Korean-translated versions of ethics books so that more people could read and understand them. The government also published books with illustrations for illiterate people.
The Four Precious Things for Studying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had a great interest in education. In Confucianism, the dominant ideology of the Joseon Dynasty, studying was admired, and thereby stationery was also seen as precious. Among them, there were four especially important items (paper, a calligraphy brush, an ink stick, and an inkstone) called munbangsawoo, which meant the four sincere friends of Confucians. We can see these items in the showcase.
Paper was quite rare and expensive at that time, so people generally used sand tables and wooden boards when practicing calligraphy. The wooden boards were made by rubbing oily powders on their surfaces to make it easier to erase the ink. This here is a bamboo strip holder. The Confucian classics, Saseo Samgyeong, were transcribed on these strips. Students used them to thoroughly memorize the contents of the classics.
This pencil case was designed to carry brushes and ink at the same time. We can see a long handle connected to a round-shaped bucket. The handle is empty inside, with space for the calligraphy brush, and the ink was kept in the round-shaped bucket. On the lid of this bucket, the Chinese characters of the 12 Chinese zodiac were engraved. Under the part connecting the handle and the bucket, there is a string which could be used for hanging it on the wall.
Painting for a Scholar’s Study
To pursue the Confucians’ ideals and devote themselves to studying, the Confucians set up this folding screen in their study rooms. The painting on the screen was called Chaekga-do, because it featured books and bookshelves. We can see various kinds of books in this painting. Myeongsimbogam was a children's textbook compiled by Pan Li-Bun in the Ming Dynasty. The title meant a valuable book that purified the mind.
This book was a Korean translation of The Analects of Confucius, which was a representative Confucian scripture that contained the words of Confucius and his disciples.
Lastly, we can see Samgang Haengshildo. It was published in 1434 by several scholars and officials including Seol Sun (?~1435) following King Sejong’s command. This book comprised paintings and short stories which were examples of Samgang, the three fundamental principles - loyalty, filial piety, and chastity for women (yeol-nyeo), which had to be observed between the kings and their subjects, parents and children, and husbands and wives.
Private Elementary Schools
A seodang was a private elementary school where young boys studied with their teacher, a hunjang. The students entered seodang at around the age of 6~7 and graduated at 14~15. As you can see in this room, however, there were some cases where adult men over 20 years old could be accepted as students of a seodang. In a big seodang, an elderly and high-performing student was picked as the class leader (a jeobjang). If this seodang had a class leader, it would be this man. Teachers taught according to the level of their students.
The main school subjects were Chinese characters and Confucianism. They learned Chinese characters by studying the book Thousand-Character Text and studied Confucianism by reading the Confucian classics, such as The Analects of Confucius. Next to the students’ books, there is a long, narrow black paper. This is a seosan, a tool used to count the number of times students read books. In the past, people used the methods of reciting the contents of books repeatedly, so they marked the number of times they had recited books or sentences by folding or unfolding the grooves on the surface of a seosan.
After graduating from seodang, the students usually went on to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such as Confucian academies (seowon) and local public schools (hyanggyo). There, students studied Confucianism more deeply and prepared for the state examinations by studying the basic scriptures of Confucianism: The Analects of Confucius, The Great Learning, The Doctrine of the Mean, The Works of Mencius, The Book of Odes, The Book of Documents, and The Book of Changes.
Meanwhile, women learned the Korean alphabet at home in order to read and write letters and documents. However, they were not able to take state examinations and work as government officials as this work was reserved for men.
Learning about Astronomy and Geography
Studying astronomy and geography was also common during the Joseon Dynasty. At that time, people believed that the sky was round and the ground was square because they thought the Sun circled the Earth. So, to understand the principles of the sky, they invented a honcheonui, a celestial globe, to observe the locations of celestial bodies. They also read the movement of the Sun through sundials and astronomical charts.
The Cheonsang-yeolcha-bunyajido was a representative celestial chart of the Joseon Dynasty. Its title meant a painting of the 12 astronomical fields in the equator of the sky. Back in traditional society, people used to transcribe or print the celestial charts which were engraved on stones on paper. Knowing the movements of celestial bodies was especially important for the kings because of their role in reading the divine will and giving farming-related information to their people. For that reason, astronomy was also called the discipline of the Emperor.
This painting is Cheonggunamseung-do, which meant the painting for traveling to scenic spots. In this painting, there is a square table with many spaces. In each space, the names of scenic spots throughout the country were written. People played games with this painting using yunmok, special wooden dice, and several tokens.
The game was quite similar to Monopoly. Usually, 5 tokens were used, each of which represented a poet, a beauty, a fisherman, a monk, and a guru. After choosing tokens, players threw a yunmok and moved their tokens according to the numbers shown on the yunmok. The starting point was Seoul (Hanyang) and the player who first returned to Seoul won the race.
Like Monopoly, this game - namseungdo-nori - could be described as a journey around the country. By playing it, people could learn the names of the scenic spots and cities of Korea along with their geographic locations.
So far, we have learned about the childhood of the nobility. Next, we turn to the important moments in their adulthood.
Translator: Hyeongmin KO
Copy Editor: Jocelyn WRIGHT
Changhyun OH
第三展厅 韩国人的一生
出生~教育
大家好,韩国国立民俗博物馆是以朝鲜时代后期的生活文化为中心,介绍祖先们生活方式的生活史博物馆。这里由三个常设展厅组成,其中第三展厅“韩国人的一生”展示了普通人从生到死经历的各种人生仪礼。那么,从现在开始逐一解说。
洞房
洞房是拜堂成亲以后新婚小夫妻共度初夜的居室。从墙上的视频里我们可以看到象征夫妻合欢的花蝶图屏风,地板上还铺着鸳鸯绣衾枕,祝福新婚夫妻像鸳鸯一样白头偕老。朝鲜时期也特别讲究“不孝有三,无后为大”。为了延续婆家的香火,新娘往往佩戴祈子斧来祈愿能够生个大胖儿子,钥匙牌和匙箸袋上面也刻有“富贵多男”、“子孙繁昌”等字样。新娘的妈妈在女儿出嫁前,特地把串有多个铜钱的钥匙牌放在陪嫁盒里,祈愿自己的女儿能够多子多财。新娘把钥匙牌挂在屋里的柜子或箱子上,祈愿新婚小家美满幸福。
三神
我们通过三神信仰也可以了解到祖先们祈盼子孙的愿望。三神如中国的送子观音,又名产神,是常年供奉的家神,据说在产妇分娩之后也会保佑母子平安。产妇顺利分娩以后,通常在房间的炕梢儿处摆上三神桌,向三神表示感谢的同时也祈求婴儿能够茁壮成长。分娩前,在三神桌上面铺上韩纸,然后放上大米、海带、清水等祈求顺产。分娩后,用供过三神的大米和海带熬汤做饭给产妇吃。墙上搁着的是供奉三神的“三神坛子”。坛子里装了大米,用韩纸盖好后供奉在里屋的搁板上。每年辞旧迎新之际,就用坛子里的大米做饭,一家人一起享用以后,又换上新米。
禁绳
上面那根稻草绳叫禁绳,大门上挂禁绳不仅表示这家有新生命诞生,也含有除厄辟邪的愿望。虽然各地区风俗稍有不同,但通常搓禁绳时都向左搓卷,然后在绳子上插上各种具有象征性的吉祥物。生了儿子通常插辣椒和木炭,因为人们相信这些可驱邪扶正。生了女儿就插松针和木炭,松针含有祈愿孩子将来擅长做针线活的意义。通常小孩子出生三周(二十一天)之后,可以撤掉禁绳。
胎室
胎室是王亲国戚或两班士大夫阶层生了孩子以后,将婴儿的胎盘装进胎缸里妥善保管的地方。自古以来人们就认为小孩子的胎盘有无限的生命力,因此分娩之后也会精心加以保管。处理胎盘的方法根据身份悬殊而大不相同。王亲国戚或两班士大夫等上流阶层通常会选择吉日,将装有胎盘的胎缸埋入风水宝地。民间则通常将胎盘和粗糠一起烧掉或埋到干净的地方。特别是王亲贵族认为胎盘的精气会影响到国家的运势,不惜大动干戈用石头做好胎室,将它埋到风水上等的地方。然后将此山命名为胎峰山,寓意为埋有胎室的山,之后会派人专门管理。
周岁
孩子出生满一年,迎来的第一个生日叫周岁。古时候婴儿死亡率比较高,人们为了庆祝小孩子平安无事地度过了第一年,也希望孩子日后能健康成长,特地为小寿星举办周岁宴。这个特别的日子里,给孩子穿上五彩袍衣和彩色花袄来祝愿小寿星长命百岁。周岁桌上摆满象征长寿的白雪糕和线团,还有各种用来抓周的东西以占卜孩子的将来。通常认为男孩子抓了钱币或粮食, 将来会成为富人;抓了书籍或毛笔,将来会成为文官;抓了弓箭,将来会成为武将。女孩子家如果抓了针线板或剪子,则表示手巧,将来会擅长做针线活。古时候士大夫家最看重登科入仕,光宗耀祖。周岁桌后面画满各种书籍的册架图屏风极好地体现了父母们望子成龙的心愿。这本《千人千字文》也是周岁桌上的主角。顾名思义,这本书是由一千人一笔一画书写而成的。家里一添丁,爷爷或父亲就会迫不及待地逐一拜托千位亲朋好友来完成此书,寄望小孩子传承千人的智慧,将来在学问上大有作为。
伦理教育
朝鲜时期以三纲五伦作为儒教伦理教育的基础,以此来建立崇德尚仁的社会。“孝、悌、忠、信、礼、义、廉、耻”等道德纲常分别意味着孝顺、友爱、忠诚、信义、礼节、义气、清廉、知耻,可谓是三纲五伦的核心。屏风图里的这八个字背后都各有典故。如这个“孝”字里有鲤鱼、扇子、竹笋和玄琴等图案,其中的竹笋代表“孟宗哭竹”的典故。故事讲的是吴国官吏孟宗一心孝顺母亲。可是有一天母亲突然病重,什么都吃不下去。于是,孟宗跑到竹林里去,想采挖母亲平日里爱吃的竹笋。这时已是寒冬季节,哪儿找得到竹笋啊?孟宗束手无策,想到母亲不禁放声痛哭起来。没想到的是,霎时间地上居然冒出尖尖的幼笋。孟宗就拿回家里给母亲做了笋羹。士大夫们将这些儒教纲常作成“文字图屏风”,作为一生信奉的价值观。国家大力表彰孝子、烈女,普及浅显易懂,图文并茂的韩文版伦理书籍。配图伦理书籍是特别为不识字的老百姓准备的。稍后会给各位介绍一幅具有代表性的《三纲行实图》。
文房四宝
关心教育必然连带上对文房用具也有极大的兴趣。古时候在房间里或书斋里读书写字时必备的书画用具我们称之为文房具。崇尚学问的儒教社会里,笔、墨、纸、砚被视为士大夫形影不离的好友,称为“文房四友”。前面的四个展示台分别展示的是笔、墨、纸、砚。因为纸张昂贵,人们只好在粉板或沙板上练习书法。粉板是在一块宽板上均匀涂抹经过浸泡的粉末,沙板则是在四方形的木箱子里填满细沙而做成的。竹册是一种经书筒,在竹签上写满四书三经等儒教经典字句,保管在这个竹筒里,背诵经典时使用。笔墨筒是用来携带笔墨的工具,圆筒形墨盒有一个长手把,手把中间是空心的,用来装毛笔等书写工具。墨盒分上下两层,下端朝上一面刻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墨盒和手把连接部分的下面有条绳子,可以挂在墙上。
册架图
朝鲜时期两班士大夫们为了提高文学修养和追求儒家理念,喜欢在舍廊房里摆放绘有文房四宝或古铜器的册架图屏风,营造书香气息的同时也达到勉励读书的效果。这里展示了许多古书。这本《明心宝鉴》是明代文人范立本借鉴中国古典当中有启发意义的内容编撰而成的童蒙读物,书名寓意启迪心灵的珍贵书籍。《论语谚解》是典型的韩文版儒教经典,用韩语诠释了孔子及其子弟言行语录集《论语》。最后是我们前面提到的《三纲行实图》。朝鲜王朝初期,偰循(?~1435)等诸位大臣奉第四代国王世宗大王之命,编制了一套韩文版的伦理教材。此教材图文并茂地描绘了“三纲”里忠臣、孝子和烈女的模范事例,阐明了上到君臣、下至父子以及夫妻之间应相互遵守的伦理纲常。
书堂
这里是书堂,相当于中国的私塾。它是私学的一种,由塾师培养男学童的民间幼儿教育机构。学童们大约在六七岁入学,十四五岁左右完成学业,偶尔也有行过冠礼年过二十的大龄学生。规模较大的书堂里,选拔年长且成绩较好的担任学生代表,被称为“接长”。如果这个书堂里也有接长的话,估计这里的那位可能就是接长了。塾师根据学童不同的文化水平因材施教。刚入门的学童学习启蒙读物《千字文》,掌握汉字的音和义;水平较高的学童背诵《论语》,或学写文章。学生们右侧那张窄窄的黑色长纸条叫“书算”。过去的学习方式是反复暗诵诗文经书,所以人们用折叠或舒展书算面上折痕的办法来记录反复背诵的次数。书堂毕业之后,学生们就会升入书院或乡校等中等教育机构,进一步学习儒家纲要以准备参加科举考试。“四书三经”被誉为当时的儒学经典。四书指《大学》、《论语》、《中庸》、《孟子》,三经指《诗经》、《书经》、《易经》。当时的女人们则在家通过韩文教育达到粗通文字,能书信往来的水平,并且通过韩文翻译书籍获取新的信息,拓展视野,增长见识。不过,科举入仕、治国安邦是男人们的专利,女人们压根就没有突破这一社会限制的机会。
天文地理教育
朝鲜时期对天文地理教育也很重视。那时的人们知道太阳是围着地球转的,认为天是圆的,地是方的。为了更好地了解天象,制作了浑天仪来认识天体运行的规律,通过描绘星座的天文图和日晷来观测二十四节气和时间。“天象列次分野之图”是朝鲜时期具有代表性的天文图,意思是将天空的赤道分为十二个部分,依次绘制而成的天文图。古时候人们通过拓印或誊抄石刻天文图来掌握星宿的位置。天文学又被誉为帝王学,因为在民以食为天的农耕社会里,国王每年都要遵循天意来告知老百姓一年当中农耕的时节。“青丘览胜图”显示出了古人高水平的地理知识。当时人们热衷于“览胜图游戏”,打开横竖布满了字画的图谱,掷名曰“轮木”的骰子,根据骰子的数字来移动棋子,以此游遍全国的山水、亭子、寺院等名胜古迹,游戏的同时又可背诵地名,可谓寓教于乐。游戏规则为:事先指定好诗人、美女、渔夫、和尚、道士等游客(棋子)的角色,从首都出发以后,最先回到起点的人获胜。
到目前为止,我们观览了朝鲜后期两班士大夫们从诞生到接受教育的人生历程。接下来参观他们成人以后的生活。
常設展示室3 韓国人の一生
<出生・教育>
こんにちは。
国立民俗博物館は、朝鮮時代後期の生活文化を中心に、先祖の暮らしを紹介する生活史博物館で、大きく三つの常設展示室で構成されています。そのうち、第3室<韓国人の一生>は、人が生まれてから死ぬまでに経験する通過儀礼について紹介している空間です。それでは、解説を始めさせていただきます。
新房(シンバン)
新房は、婚礼を挙げた新郎新婦が初夜を過ごす部屋です。壁には、夫婦の和合を象徴する花と蝶が描かれた花蝶図屏風を表現した作品があり、床には、オシドリのように夫婦が末永く一緒にいられることを祈る意味で、オシドリが刺繡された布団と枕(鴛鴦衾枕)が敷かれています。朝鮮時代には、男子による家系継承が重要だったので、新婦は男児の出産を願い、祈子斧(斧形の装身具)を身に着けたり、鍵牌や匙箸入れなどに「富貴多男」「子孫繁栄」の文字を入れました。特に、複数の硬貨(別銭)が取り付けられた鍵牌は、子宝と富に恵まれるよう祈る意味で、母親が嫁いで行く娘に持たせました。新婦は、鍵牌を部屋の箪笥などに掛け、家族の健康と幸せを祈願しました。
三神(サムシン)
出産に対する先祖の強い願望は、三神(サムシン)を通しても垣間見ることができます。三神は、子どもを授け母子を守ってくれるという家の神で、産神ともいいます。人々は出産後、妊娠と出産を司る三神に感謝を込めて、アンパン(部屋)の隅に三神床(サムシンサン:供え物を載せたお膳)を置き、子どもの無事成長を祈願しました。出産前には、三神床に韓紙を敷いて米・ワカメ・井華水(早朝に汲んだ井戸水)などを供え、出産直後には、三神床に置いてあった米とワカメでご飯とワカメスープ(ミヨックク)を作り、産婦に食べさせました。
壁の棚に載せてあるものは、三神の神体である「三神ダンジ(壺)」です。壺の中に米を入れて韓紙で覆い、アンパンの棚の上に置きました。年が替わると、壺の中の米を取り出してご飯を炊き、家族みんなで食べて、壺に新しい米を入れました。
クムチュル
上をご覧いただきますと、子どもが生まれた時に周囲に子どもの出生を知らせ、悪鬼や不浄なものを遮る意味で、表門にクムチュル(禁縄)が掛けられています。クムチュルは、地域によって多少違いはありますが、左撚りの縄に何かを象徴するものを挿しました。男児が生まれると、炭と赤い唐辛子を挿しましたが、これらは悪鬼・不浄を遠ざけるものと考えられました。女児が生まれると、炭と松葉を挿しましたが、松葉には裁縫が上手になるようにとの願いが込められています。子どもが生まれてから3週(21日)が過ぎると、クムチュルを外しました。
胎室
胎室は、王室や両班(ヤンバン)などの上流層で、赤ちゃんの胎(へその緒・胎盤)を壺に入れて保管した所です。昔から赤ちゃんの胎には生命力が宿っているとして、出産後も大切に保管されました。胎を処理する方法は、身分によって異なりました。王室や両班層では、吉日を選び、胎を壺に入れて山に埋めましたが、民間では、胎を籾殻に埋めて燃やしたり、清潔な所に埋めました。特に王室では、胎が国運に繋がるとされ、石で胎室を作って山に埋めました。その山は、胎室があるということで、胎封山もしくは胎峰(峯)山(*どちらも発音は「テボンサン」)と呼ばれ、特別に管理されました。
トル
子どもが生まれてから一年経ち、生後初めて迎える誕生日の「トル」になりました。乳児死亡率が高かった昔は、子どもが無事に一年目の誕生日を迎えたことを記念し、健やかな成長を祈る意味でお祝いの宴を開きました。この特別な日に、厄除けと長寿の願いを込めて、袖に様々な色を使ったオバンジャン(五方丈)トゥルマギ(周衣)やセクトンチョゴリを子どもに着せました。トルサン(祝い膳)には、子どもの長寿を願うペクソルギ(お餅)を載せ、子どもの前に綛糸など様々な品物を並べて子どもに選ばせ(トルジャビ)、その将来を占いました。男児が貨幣や穀物を手に取ると将来お金持ちになり、本や筆を取ると文官、弓や矢を取ると武官になると考えられました。女児は糸巻やはさみを掴むと裁縫が上手になるとされました。当時、両班家では、一生懸命に勉強して科挙(官吏登用試験)に合格し、官吏になることが最高の出世とされました。それで、親はその願いを込めて、トルサンの後ろに、たくさんの本が描かれている冊架図屏風を飾りました。また、トルサンの上に『千人千字文』を載せました。この本は、題名通り千人が一文字ずつ書いて完成させたもので、子どもが生まれると、祖父や父親が千人の知人に頼んで一文字ずつ書いてもらったものです。これには、千人の知恵が子どもに伝わって、将来、学問に優れ立派な大人になってほしいとの願いが込められています。
倫理教育
朝鮮時代には、三綱五倫に基づく儒教的倫理教育を通して、道徳的な社会を築こうとしました。儒教における徳目の「孝・悌・忠・信・礼・義・廉・恥」は、それぞれ、「親孝行・兄弟間の友愛・忠誠・信義・礼節・義理・清廉・恥を知る」を表す文字で、三綱五倫の核心とも言えます。
屏風に描いてあるこの八文字は、各々に関連する故事があります。「孝」の字には、タケノコ・鯉・扇・琴が描かれています。このうち、タケノコは「孟宗哭竹」という故事と関連があります。中国三国時代の呉に、親孝行でとても有名な孟宗という官吏がいました。真冬のある日、孟宗の母親が病で何も食べられない状態になったので、孟宗は急いで竹林に行き、母親の大好物であるタケノコを探しました。しかし、寒中でいくら探してもタケノコを見つけられず、嘆いていたところ、驚くことに雪の中からタケノコが生えてきて、孟宗はタケノコを母親に供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話です。士大夫は、このような儒教の徳目を「文字図」屏風で表し、生涯従うべき規範としました。
国でも、孝子や烈女を表彰し、誰もが理解し実践できるよう倫理書籍をハングルで記述・図解し、普及させました。特に、図版入り倫理書籍は字を知らない人のためのものでしたが、その代表例の『三綱行実図』について、後ほどご紹介します。
文房四友
教育に対する関心は、自然に学用品への関心にも繋がります。伝統社会の人々は、文章を書いたり本を読むときに使う道具を、勉強部屋や書斎に備えておくものという意味で「文房具」といいました。学問を崇める儒教社会において、紙・筆・墨・硯は、常に士大夫が身近に置いて親しむべき四つの友と考えられて「文房四友」といい、大事にされました。
こちらの四つの展示ケースに、関連の展示品があります。昔は、紙が貴重だったため、粉板や砂板で習字の練習をしました。粉板は、石灰粉を油や膠で練って板に塗ったものであり、砂板は、幅の広い木箱に細かい砂を詰めたものです。儒教経典の四書三経を竹の札に記した竹冊が経書筒に入っていますが、これは経典の暗記に用いられました。筆墨筒(矢立)は、筆と墨汁を持ち運ぶ携帯用の筆記用具です。これは、丸い墨壺に長い柄が付いた柄杓形で、筆を収納できるように柄の内部は空になっています。墨壺の蓋には「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が刻まれており、墨壺と柄が繋がっている部分の下には、壁などに掛けられるように紐が付いています。
冊架図(文房図)
朝鮮時代の士大夫は、真剣に学問と向き合い、儒教的理想を追求するために、本・文房具・古銅器などを描いた「冊架図」の屏風をサランバン(男性の部屋)に置いて、常に学問に励むことのできる書斎の雰囲気を作ろうとしました。こちらに、数冊の本が展示されています。『明心宝鑑』は、中国明代に范立本が中国の古典から教訓などの言葉を集めて編纂した児童用教材で、「心を清らかにする宝物のような貴重な本」という意味です。『論語諺解』は、孔子と弟子たちの言葉を集録した『論語』を読み下してハングルで表記した儒教経典です。また、こちらに、前述の『三綱行実図』があります。朝鮮の第四代王である世宗(セジョン)の指示で、偰循(ソル・スン)などが、君臣・親子・夫婦が守るべき道理、即ち三綱の模範となる忠臣・孝子・烈女の逸話を、ハングルで解説し図解した倫理教育書です。
書堂
書堂(ソダン)は、男の子のための教育機関で、教師は「訓長」、生徒は「学徒」と呼ばれました。学徒は6~7歳で入学し、14~15歳頃に学業を終えました。しかし中にはこちらのように、冠礼(成人儀礼)を終えた20歳以上の成人男性がいる場合もありました。規模が大きい書堂では、年長で成績が優秀な学徒が接長となり、他の学徒の面倒を見ました。仮に、この書堂にも接長がいるとしたら、この男性が接長なのかもしれません。訓長は、学徒のレベルに合わせて教育を行いました。
書堂では、漢字の音訓を覚えるための『千字文』から、『論語』などの儒教経典に至るまで、漢文教材を暗唱したり習字の練習をしました。学徒の手前にある本の横に、細長い黒色の紙が置いてありますが、これは「書算(ソサン)」というものです。昔は、本を繰り返し何度も読んで内容を覚える学習法を取り入れたので、書算を用いて本を読んだ回数を数えました。書算の表には複数の切れ目が入っており、本を読み終わる度にこの切れ目を折り曲げてゆき通読回数を記録しました。
書堂での学業を終えた学徒は、さらに儒教的徳目を身に付け科挙試験に備えるために、中級教育機関である書院(ソウォン)や郷校(ヒャンギョ)へ進学し、そこで本格的に儒教の基本経典である四書三経を学びました。四書は『論語』『孟子』『大学』『中庸』を、三経は『詩経』『書経』『易経』を指します。
一方女性は、家でのハングル教育を通して文字を覚え、手紙を交わすことができ、ハングル書籍から新情報を得て知識の幅を広げることもできました。しかし、官職に就くような社会的活動は男性の専有物とされ、女性はなかなかこの壁を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天文・地理の教育
朝鮮時代には、天文・地理の教育も行われました。朝鮮時代の人々は、太陽が地球の周囲を回っており、空は丸く、地は四角いと考えました。そこで、天を理解するために「渾天儀」を作り、天体の運行について学び、星座が描かれた天文図や日時計を通して二十四節気と時間を観測しました。
「天象列次分野之図」は朝鮮時代の代表的天文図で、天象を十二等分して順に並べた図という意味です。昔の人々は、石に刻まれた天文図の拓本を取ったり、紙に描き写して、星座の位置などを把握しました。特に、天文学は「帝王学」とも呼ばれましたが、これは、国王が天を崇めてその様相を観察し、農作業に適した時期や天気など、農耕社会において最も重要な情報を提供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
「青丘覧勝図」は、朝鮮時代の人々の地理に対する理解度が高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人々は、縦横の欄にぎっしりと文字の詰まったこの図を広げてサイコロに似た「輪木(ユンモク)」を投げ、出た目に合わせて全国の山・亭・寺院などの名勝を遊覧しながら地名を覚える「勝覧図遊び」を楽しんでいました。この遊びは、まず詩人・美人・漁師・僧侶・道士などの旅人(駒)を決め、ソウル(漢陽)から出発して一番最初にソウルに戻ってくる旅人が勝つゲームです。
ここまで、朝鮮時代後期における両班(ヤンバン)の出生から教育までの様子をご覧いただきました。次に、成人になった両班の生涯が続きます。
日本語翻訳 河閔恵(ハ・ミンヘ)
翻訳監修 中村克哉(なかむら かつ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