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관례, 혼례, 가족
앞서 조선 후기 양반들의 출생부터 교육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조선시대의 성인식인 관례부터 풍산 김씨 허백당 문중의 가족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관례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으로 남자는‘관례(冠禮)’, 여자는 ‘계례(筓禮)’라는 성인식을 하였습니다.‘관례’는 남자가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교적 전통사회의 성인식으로 사대부 집안에서 주로 행해졌습니다. 15세에 집안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치포관 ․ 유건 ․ 갓’등을 차례로 쓰고 성인으로서의 이름인 자(字)를 부여 받음으로써‘관례’를 치렀습니다. 여자는 15세 전후에 쪽을 지고 비녀를 꽂는‘계례’를 행하였는데, 성인식을 대신하여 일반적으로 혼례 전에 행하였습니다.‘관례’와‘계례’가 끝나면 조상이 계신 사당에 가서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고, 집안 어른과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한편 민간에서는 2월 초하루 머슴날과 7월 백중날에 두레가 날 때 ‘들돌들기’를 통해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납폐
조선시대는 남녀구별이 엄격한 유교사회로 중매결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매는 남자와 여자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적은 사주단자(四柱單子)로 궁합을 맞추고 혼사가 정해지면 신랑집에서는 약혼의 표시로‘혼서지(婚書紙)’와 예물을 담아서‘납폐함(納幣函)’을 보냈는데요. 혼서지와 함께 신부의 치맛감 등 혼수품과 그 내역을 적은 물목단자를 납폐함에 담아서 신부집에 보냈습니다.‘납폐함’은 혼인을 상징하는 예물이기 때문에 자손번창, 가내평안을 뜻하는 글자 및 수복(壽福)문자 등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나무기러기는 신랑이 신부의 부모 또는 친척 앞에서 신부와 한평생을 사이좋게 함께 할 것을 서약하는‘전안례(奠雁禮)’때 올립니다. 사선은 혼례 때 신랑이 말을 타거나 걷는 동안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고, 신부는 모란이 자수된 혼선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친영
친영(親迎)은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신부를 신랑 집으로 맞이하여 혼례식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방을 차리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친영 풍속은 실제로 잘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주자가례』의 혼례 절차와 전통관행이 절충되어, 신랑이 신부집에서 초례를 행하되, 당일이나 3일 후에 신랑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폐백을 올리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초례청
혼인은 가족을 이루는 최초의 과정으로 일생의례 중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 혼례를 ‘인륜지대사’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신랑 신부의 혼례가 진행되고 있는 신부집 마당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처음 만나서 절을 하고 서로 합환주를 마시는 예식을 초례(醮禮)라고 하며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이라고 합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초례청은 신랑 집에 차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행에 따라 신부 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차렸습니다. 혼례는 신랑이 신부 집에 나무기러기를 드리는‘전안례(奠雁禮)’, 신랑과 신부가 맞절하는‘교배례(交拜禮)’, 술잔을 나누는‘합근례(合巹禮)’순서로 진행 됩니다. 초례상에는 청색․홍색의 초, 솔가지와 대나무․수탉과 암탉․밤․대추 등을 차렸습니다. 초례는 진행자가 초례상 뒤쪽에 서서 식순에 따라 혼례식을 진행하는데,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은 동쪽에 서며, 신부는 서쪽에 서서 예식을 진행하였습니다.
혼례복은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신부는 활옷에 화관(花冠)을 쓰거나 원삼(圓衫)에 족두리를 썼습니다. 사모관대는 조선시대 관리의 일상 집무복으로,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으며 목화(木靴)를 신고 허리에 각대를 차는 것을 말합니다. 신부는 다홍치마에 분홍속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녹색 혹은 노란색 저고리를 입으며 원삼(圓衫)이나 활옷을 입습니다. 신부의 활옷과 화관 등은 신랑 집에서 마련하여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에서 공동으로 장만하여 두었다가 사용하였습니다. 얼굴에는 연지 곤지를 찍고 화장을 했습니다. 현대에도 간혹 전통혼례를 하기도 하며, 서양식 혼례를 하더라도 폐백의 풍습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시부모와 시댁의 어르신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신부가마
신부는 혼례를 마치고 화려하게 꾸민 신부가마를 타고 신랑 집으로 신행을 떠났습니다. 앞뒤에 각각 2명씩 총 4명이 가마를 들고 이동하기 때문에 사인교(四人轎)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나쁜 기운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가마위에 호랑이 가죽을 덮었는데, 없을 경우에는 호피무늬 이불로 대신하였습니다. 가마 안 방석 밑에는 액을 막아주는 숯을 깔고,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목화씨를 넣었습니다.
가족
조선시대에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가 천륜으로 규정되면서 가족 간의 유교적인‘효’윤리가 중요한 사회적 규범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였고, 삼년상과 조상 제사는‘효’의 지극한 표현이었습니다. 이에 집안을 대표하는 가장은 가계 계승을 위해 제사와 재산을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족보에 가계 및 친족 관계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조선 후기 한 가문의 가족 간 생활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매년 한국국학진흥원과 공동으로‘가족’전시장을 개편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일곱 번째로“이치를 깨닫고 나라를 생각하다 <풍산김씨 허백당 김양진 문중의 가족이야기>‘ 입니다.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1467~1535)은 조선시대 11대 왕 중종 때의 인물로, 청백리로 유명하며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습니다.
이후 허백당 문중의 인물들은 경상북도 안동, 봉화, 예천 등지에 거주하며, 몸과 마음을 닦아 기른 인격과 학문을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가 나라를 생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곳에는 허백당 김양진 문중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유물은‘유경당 현판(幽敬堂懸板)’입니다. 이 현판은 김의정(金義貞,1495~1547)이 안동부 풍산현 오미동에 거처하던 집의 당호 편액으로,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1832~1914)가 썼습니다. 김의정은 김양진의 아들로, 15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6년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다음은‘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입니다. 허백당 김양진의 12대손 김중휴(金重休, 1797~1863)가 가문을 선양할 목적으로 19명의 조상에 얽힌 31가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엮어 만든 서화첩입니다. 이 그림은‘완영민읍수도(完營民泣隨圖)’인데요, 허백당 김양진이 전라도 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푼 이야기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고을사람들이 전송하러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따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김숭조홍패(金崇祖紅牌)’는 진사 김숭조(金崇祖, 1598~1632)가 1629년 문과에 병과 1인에 급제한 증서입니다. 조선시대 16대 왕 인조는 김양진의 증손자인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소과(小科) 에 합격하고, 5형제가 문과급제를 하자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은 선조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많은 관인들 뿐 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2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입니다. 풍산김씨 허백당 김양진 문중의 가족이야기를 통해, 가족 간의 소중한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앞으로도 매년 한국 명문가들의 가계 계승 및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관례’부터 가족이야기까지 보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조선시대 과거제도부터 환갑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Permanent Exhibition 3 Korean Life Passages
Coming of Age Ceremonies · Marriage · Family
Having learned about the childhood of the nobil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 now explore what their adulthood was like, starting with the coming of age ceremonies.
Coming of Age Ceremonies
Back in the Joseon Dynasty, people went through coming of age ceremonies at certain ages. According to the Chinese book of etiquette, Family Rituals of Zhu Xi, a coming of age ceremony called a gwallye was held for men and a gyerye was held for women. Gwallye were mostly held among noble families to formalize the entrance of young boys into adulthood. Around the age of 15, with the presence of elders, boys from noble families tied their hair into top knots, sangtu, and wore various Confucian hats in sequence: chipogwan, yugeon, and gat. After this procedure, they were given adult names, ja, which symbolized they had become adults.
Meanwhile, women around the age of 15, pulled back their hair into low buns, jjok, and wore ornamental hairpins, binyeo, to hold the buns in place. In many cases, a gyerye was held before a wedding ceremony. After the coming of age ceremony was finished, family members greeted ancestors in their family shrines.
Commoners did not usually participate in special coming of age ceremonies. To be accepted as adult members of their communities, common men had to take a membership test. The test called deuldol-deulgi involved picking up a stone. This procedure was a way of proving their strength, and it acknowledged their capacity to serve as workers. It was held in either February or July.
Bridal Gifts
In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based on Confucianism, marriages were generally arranged by matchmaking. When matchmakers arranged marriages, the two families checked a couple’s gunghap, or marital harmony, by comparing their birth years, months, days, and hours. If the two families agreed to the marriage, the groom’s family sent a box of bridal gifts, including a letter of betrothal, to the bride’s family. This box of bridal gifts was the symbol of marriage, so people decorated it with auspicious patterns, such as 壽 (longevity) or 福 (fortune).
A pair of wooden wild geese was regarded as the symbol of a happy marriage. During the jeonallye ceremony, the groom presented a pair to the bride’s family pledging to always love and respect his bride. This silk fan, a saseon, was used to cover the groom’s face on his way to the wedding hall. A honseon, a wedding fan embroidered with peony flowers, was used for the bride’s face.
Welcoming a Bride
The meaning of chinyeong was to welcome a bride. In the Joseon Dynasty, there had been an old custom of holding wedding ceremonies at the bride’s house and staying there for a while, so the practice of chinyeong was hardly accepted.
However, according to Family Rituals of Zhu Xi, the groom should welcome his bride to his house and hold wedding ceremonies there. Thus, around the late Joseon Dynasty, the Korean tradition and procedures changed such that the groom and bride had a wedding ceremony at the bride's house and then returned to the groom's house on the same day or three days later to greet his parents.
Wedding Ceremony
The wedding ceremony was considered the most important moment of one’s life, because it led to the birth of a new family. Now, we see a backyard in the bride’s house, where the wedding ceremony was held. The place where the groom and bride greeted each other and shared special liquor was called a choryecheong. According to Family Rituals of Zhu Xi, a choryecheong was supposed to be set up at the groom’s house, but in Korea, it was traditionally set up at a wooden-floored hall (daecheong) or in the yard of the bride’s house.
The wedding procedures consisted of a jeonallye (a wooden-goose presenting ceremony), a gyobaerye (a bow-exchanging ceremony), and a hapgeullye (a liquor-sharing ceremony). On the wedding table, we can see various symbolic objects, including red and blue colored candles, pine twigs, bamboo twigs, a hen, a rooster, chestnuts, and dates. The host presided over the wedding by standing behind the table, with the groom standing on the east side and bride on the west.
The wedding attire included a samogwandae for a groom and a hwarot, a wonsam, a hwagwan, and a jokduri for his bride. A samogwandae was a uniform worn by government officials, which consisted of a samo (a black gauze hat), a dallyeong (a robe with a round neckband) and mokhwa (black boots). The bride wore a crimson skirt and either a green or yellow jeogori (a short jacket) over a pink inner garment. Over the jeogori, they wore a wonsam (a ceremonial robe) or a hwarot (a wedding overcoat). Sometimes, the groom’s family prepared the bride’s wedding attire but, in most rural areas, villages kept bridal robes and crowns ready for rent. For the makeup, brides put rouge called yeonji-gonji on their cheeks.
This traditional wedding ceremony is still occasionally held today. Even at modern style weddings, the pyebaek custom, where the couple greets the groom’s parents and relatives, remains.
Bridal Palanquins
After the wedding ceremony, the bride got in an elaborately decorated bridal palanquin and was delivered to the groom’s house, while the groom joined the procession on a horse. This palanquin was called a 4-person palanquin because it was carried by four men. To prevent evil spirits from accessing it, people covered the palanquin's top with a tiger skin. If people failed to get a tiger skin, it was replaced with a leopard-print blanket. Inside the palanquin, charcoal and cottonseeds were spread, representing protection from evil and fecundity respectively.
Families
In the Joseon Dynasty, filial piety was considered the essence of humans as the blood ties between parents and their children were defined as Heaven-sent relationships. People believed the filial piety could be practiced by observing a samnyeonsang (a three-year mourning period after the death of parents) and holding annual ancestral rites.
The head of a family bequeathed property along with the responsibility to conduct ancestral rites to his eldest son for the succession of the family line. Also, he recorded the kinship in the genealogy book of his family. The succession of the family from father to son was natural at that time, so the eldest son inherited the family fortune as well as the obligation of serving ancestral rites from his father.
The next section is about the history of a family. This section is reorganized every year with the collaboration of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and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To present various family customs and lifestyles, we select one family each year and display their relics. This exhibition is the seventh collaboration and presents the history of the Kim Yangjin family of the Poongsan Kim clan. The title is Realize the Nature of Things and Think of One’s Country.
Kim Yangjin (1467-1535) was a scholar and a government official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the 11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He was such an upright person and upheld the honor of his family. Since Kim Yangjin settled in Andong, his descendants lived in Andong, Bonghwa, and Yecheon, Gyeongsangbuk-do. They studied hard and served the country by working as government officials.
In this showcase, we can see various artifacts donated by Kim Yangjin’s family. This one was a signboard that Jeong Hakgyo, a prominent calligraphist in the 19th century, wrote for the house where Kim Euijeong, Kim Yangjin’s first son w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26, lived.
Next, this was a collection of writings and paintings of 31 stories related to the 19 ancestors of the family written by Kim Joonghyu (1797-1863), a 12th-generation descendant of Kim Yangjin. The painting next to the book, depicted the scene where Kim Yangjin left his assigned region upon finishing his term as a governor of Jeolla-do, a southern province, and his people sent him off with tears.
Lastly, I would like to show you an examination certificate, a hongpae. This was the certificate of Kim Soongjo, wh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1th place in 1629. Kim Soongjo had 7 brothers, among whom four passed state examinations. King Injo, the 16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was so impressed by this uncommon and happy occasion that he bestowed a new name on the village: Omi, which meant the five exemplary cas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bout 20 independence activists from the Poongsan Kim clan fought hard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Through this exhibition of Kim Yangjin’s family, we hope you that you have learned about and can remember the love between family members and the precious teachings of our ancestors.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will continue to introduce various stories about the prestigious families of the Joseon Dynasty.
This concludes the part on adulthood in the third exhibition. Next up, we look at how the nobility experienced midlife.
Translator: Hyeongmin KO
Copy Editor: Jocelyn WRIGHT
Changhyun OH
第三展厅 韩国人的一生
冠礼, 婚礼, 家族
之前,我们观览了朝鲜后期两班士大夫们从诞生到接受教育的人生历程。从现在开始,我们参观朝鲜时代的成人仪式冠礼,以及丰山金氏虚白堂门宗的家族故事。
冠礼
朝鲜时代受《朱子家礼》的影响讲究行成年礼, 男子的称“冠礼”女子的称“笄礼”。冠礼是儒教传统社会男子从幼童世界进入大人世界的成人仪式,主要在士大夫家进行。男子15岁行冠礼,在家中长辈面前结上发髻,依序戴上“缁布冠、儒巾和笠子帽”,获得作为成年人的名字"字"。女子则是在15岁前后行笄礼,盘发髻,插发簪。不过一般以婚礼替代成人仪式,通常就在婚礼前举行。冠礼和笄礼结束后要参拜供奉祖先的祠堂,禀告自己已经成人,并拜见家里的长辈和邻居。另一方面,民间行成年礼的方式则是在2月初一长工日和7月百中日,由村里的互助组举行“抬石头游戏”。
纳币
朝鲜时代是严格讲究男女有别的儒教社会,婚嫁一般是采取媒妁婚的方式。媒人索取写有男女双方生辰八字的四柱单子来推算姻缘配对, 即所谓八字合婚。如决定成婚,则男方将证明订婚的“婚书纸”和聘礼放入“纳币函(即彩礼箱)”送给女方。往彩礼箱里装婚书纸的同时,要放进新娘的裙料等婚需用品和记录物品明细的清单,然后送到新娘家。彩礼箱是象征婚姻的财礼,因此装饰着祈愿子孙繁昌、家庭平安的文字及寿福文字等图案。木雁是“奠雁礼”上的信物,新郎在新娘的父母或亲戚面前以此承诺与新娘和睦共度一生。紗扇是婚礼中,新郎骑马或走路时用于遮面的用具,新娘则用牡丹刺绣婚扇掩面。
迎亲
迎亲是新郎亲自上门迎接新娘的意思, 指的是把新娘接到新郎家举行婚礼。但韩国传统上一般是在新娘家举行婚礼,然后安置新房,因此,实际上并未履行《朱子家礼》的迎亲风俗。到了朝鲜后期,《朱子家礼》的婚礼程序和传统惯例折中后,新郎在新娘家举行婚礼的当天或三天后,回到新郎家,拜见公婆,敬献币帛。
醮礼厅
婚姻是组成家庭的第一步,被认为是人生礼仪中最重要的事情,因此婚礼被称为“人伦之大事”。这里是新郎新娘举行婚礼的地方新娘家的院子。新郎和新娘初次见面行礼,共饮合欢酒,这个仪式叫做醮礼,行礼的地方叫做醮礼厅。《朱子家礼》规定醮礼厅设在新郎家,而韩国根据惯例在新娘家的大厅或者院子里举行。婚礼分为三个步骤,依次是新郎向新娘家送上用木头做的木雁,称“奠雁礼”;新郎和新娘互拜,称“交拜礼”;新人共饮合欢酒,称“合卺礼”。醮礼桌上一般摆放有蓝烛、红烛、松枝、绿竹、一对公鸡和母鸡、栗子和红枣等等。司仪站在桌上后面,按照仪式程序主持醮礼,行礼中依阴阳原理新郎站在东边,新娘站在西边。
传统婚礼服中新郎戴纱帽冠带,新娘穿阔衣、戴花冠,或穿圆衫、戴簇头。纱帽冠带是朝鲜时代官吏的常服,即头戴纱帽、身穿团领、脚蹬木靴,腰上扎腰带。新娘穿大红裙,上配粉红色内襦,外罩绿色或黄色短上衣,然后穿上圆衫或阔衣。新娘的阔衣和花冠等物品,有由新郎家筹办的情况,也有由村里共同置备,共同使用的情况。新娘的脸上涂脂抹粉,点红色的吉祥痣。现代偶尔也举行传统婚礼,即使举行西式婚礼,仍保留着献币帛习俗(即拜姑舅礼),向公婆和婆家长辈问安行礼。
新娘花轿
新娘在婚礼结束后,乘坐装饰华丽的花轿,前往新郎家,这被称为新行。花轿前后各2人,共4人抬轿,也叫四人轿。还有,为了驱邪避祟,轿顶要盖上虎皮,如果没有虎皮就搭有虎皮纹的被面,轿内坐垫的下面放置辟邪的木炭和祈愿子孙兴旺的棉花籽。
家族
朝鲜时代重视父母和子女血缘关系的天伦秩序,家庭成员间的儒教“孝道”伦理被视为重要的社会规范。父传子、子传孙,传宗接代对子女来说是人子的本分,三年丧和祭祀祖先则是至孝的表现。作为一家之主的家长为了传宗接代而将祭祀和财产交给长子,族谱上明确家系和亲族关系。
这里可以了解朝鲜后期一个家族的家庭生活史。
国立民俗博物馆每年都会和韩国国学振兴院共同进行“家族”展场的改版。这次展览是第七版,标题为“知理报国——丰山金氏虚白堂金杨震门宗的家族故事”。虚白堂金杨震(1467-1535)是朝鲜时代第11代王中宗时期的人物,以清白吏著称,家门中兴。
此后,虚白堂门宗的后人们居住于庆尚北道安东、奉化、醴泉等地,以修身养性、治学问道为基础,出仕尽忠,报效国家。
这里展示着虚白堂金杨震门宗的遗物。第一件文物是"幽敬堂悬板"。该匾额是金义贞(1495~1547)居住的安东府丰山县五美洞故居的堂号匾额,由梦人丁学教题写。金义贞是金杨震的儿子,1516年进士合格,1526年文科及第。下面是《世传书画帖》。这是虚白堂金杨震的第12代孙金重休(1797~1863)为了弘扬门风,将19位祖先的31则故事用文字和图画编写成的书画册。这幅画是《完营民泣随图》,讲述的是虚白堂金杨震出任全罗道观察使施行善政的故事,描绘了任期结束后返回时,地方上送行的人流着眼泪跟随在他身后的场面。
最后介绍的是“金崇祖紅牌”,这是进士金崇祖(1598~1632)于1629年文科丙科独占鳌头的榜书。相传在金杨震的曾孙金大贤之子一家八兄弟全部通过小科,五兄弟文科及第后,朝鲜时代第十六代王仁祖特赐村名“五美”。丰山金氏虚白堂一门谨遵先祖遗训,不仅培养出了众多的官员,而且在日帝强占期也涌现出了20多名独立运动家。我们希望通过丰山金氏虚白堂金杨震门宗的家族故事,能提供一个铭记和践行家人间珍贵亲情的机会。国立民俗博物馆计划今后每年举办有关韩国名门望族家族传承故事的展览。
到目前为止,我们观览了朝鲜时代从冠礼到家族故事等人生历程的场面。接下来参观朝鲜时代的科举制度和花甲礼俗。
常設展示室3 韓国人の一生
<冠礼・婚礼・家族>
前回、朝鮮時代後期における両班(ヤンバン)の出生から教育までの様子を紹介してきました。ここからは、朝鮮時代の成人式である「冠礼」や、豊山(プンサン)金氏の虚白堂(ホベクタン)家の物語などをご紹介します。
冠礼
朝鮮時代には、中国の家庭儀礼書である『朱子家礼』の影響により、男性は「冠礼」、女性は「笄礼」という成人式を行いました。冠礼は、男児が大人の世界へ入る儒教的伝統社会の成人儀礼で、主に士大夫家で行われました。15歳ぐらいになると、親族の前でサントゥ(まげ)を結い、緇布冠(チポグァン)・儒巾(ユゴン)・カッ(黒笠)などを順に被り、字(あざな)という成人としての新しい名前を与えられることが冠礼のしきたりでした。女性の場合、15歳前後に髪を後ろで束ねて簪を挿す笄礼を行いましたが、婚礼の前に行われるのが一般的でした。冠礼と笄礼を終えると、先祖を祀った祠堂で成人になったことを報告し、親族や近所に挨拶をしました。
一方、庶民の間では、2月の朔日の作男を励ます日(モスムナル)や、7月の百中(ペクチュン)の日に、青年がトゥレ(結い)に参加するために行った「石担ぎ」が成人式の代わりでした。
納幣
朝鮮時代は男女の区別が厳しい儒教社会で、お見合い結婚が一般的でした。仲人は、男女の生年月日と出生時間を書いた「四柱単子(サジュタンジャ)」を通して男女の相性をはかり、婚姻が決まったら、婚約の印として、新郎側から「婚書紙(ホンソジ)」と礼物(結納)を入れた「納幣函(ナッペハム)」を新婦側に送りました。その中には、新婦用の反物などの贈り物と、その内訳を書いた「物目単子」が入れられました。納幣函は、婚姻を象徴する礼物なので、子孫繁栄・家内安全を意味する字や寿・福の字などで飾られました。
木雁(木彫りの雁)は、新郎が新婦の両親と親戚の前で、新婦と一生仲良く過ごしていくと誓う「奠雁礼(チョナンレ)」の時、新婦家に贈るものです。
紗扇(サソン)は、婚礼の時に、新郎が馬に乗ったり歩いたりする間に顔を隠すために使われ、新婦は牡丹の刺繍が入った婚扇(ホンソン)で顔を隠しました。
親迎
親迎は、新郎が新婦を親しく迎えるとの意味で、新郎の家に新婦を迎えて婚礼を挙げることを意味します。ところが、韓国では一般的に新婦の家で婚礼を挙げ、新房(シンバン)を設けるのが慣わしだったので、『朱子家礼』に出てくる親迎の風習は、実際にはあまり行われませんでした。朝鮮時代後期になると、『朱子家礼』が示す婚礼の手順と伝統的なしきたりが折衷されました。婚礼の儀式は、新郎が新婦の家に行って挙げましたが、その当日か三日後に、新婦が婚家に行って舅姑に挨拶をする「幣帛(ペベク)」を行いました。
醮礼庁(チョレチョン)
婚姻は、家族を築く最初の過程として、通過儀礼のうち最も重要なこととされ、婚礼を「人倫之大事」といいました。ここは、新郎新婦の婚礼が行われている新婦家の庭です。新郎と新婦が初めて顔を合わせ、お互いにお辞儀し、杯を交わして合歓酒を飲む礼式を「醮礼(チョレ)」といい、その儀式が行われる会場を「醮礼庁(チョレチョン)」といいます。『朱子家礼』によると、醮礼庁は新郎の家に設けることになっていますが、韓国では慣わしに従って新婦の家のテチョン(板の間)や庭に用意されました。婚礼は、新郎が新婦家に木雁を贈る「奠雁礼(チョナンレ)」、新郎新婦が向かい合ってお辞儀する「交拝礼(キョベレ)」、お互いに杯を交わす『合巹礼(ハプクンレ)』の順で行われます。醮礼床(チョレサン)には、青色と紅色の蝋燭・松や竹の枝葉・雄鶏と雌鶏・栗・ナツメなどを並べました。醮礼は、司会者が醮礼床の後ろに立ち、式次第に沿って進行しました。また、陰陽の原理に合わせ、新郎は東側、新婦は西側に立って向かい合いました。
婚礼服について、新郎は紗帽冠帯(サモグァンデ)を着用し、新婦はファロッを着て花冠を被ったり、ウォンサム(円衫)にチョクトゥリ(簇頭里)を着用したりしました。紗帽冠帯は、朝鮮時代の官服を表す言葉で、紗帽という冠帽を被り、団領(タンリョン:官吏の執務服)と角帯(カクテ)を身に付け、モクァ(木靴:皮・錦などで作られた長靴)を履いた身なりです。新婦は、紅色のチマ(スカート)と桃色のソクチョゴリ(下着)の上に、緑色もしくは黄色のチョゴリ(上着)を着て、ウォンサムかファロッを重ね着しました。新婦のファロッや花冠などは、新郎家から送られる場合もありましたが、村人たちが共同で使えるように用意されたものもありました。新婦の頬と額には赤い丸のヨンジゴンジを付けました。現代でも伝統婚礼の形で結婚式を挙げる場合があり、洋風の結婚式を行っても舅姑と婚家の親族に挨拶をする幣帛(ペベク)の風習は未だに残っています。
花嫁の輿(四人轎)
婚礼を終えた花嫁は、華やかな輿に乗って婚家へ向かいました。前後に2人ずつ、合わせて4人が輿を持ち上げて移動するので「四人轎」ともいいます。魔よけや邪気祓いの象徴として、輿の上に虎の皮を掛けましたが、虎の皮がない場合、代わりに虎柄の毛布などで覆いました。輿の座布団の下には、厄除けの意味を持つ炭と、子孫繁栄を意味する綿種を置きました。
家族
朝鮮時代には、親子の血縁関係は天が結びつけてくれた「天倫」とされ、家族間における儒教的倫理の「孝」が社会的規範として重視されました。父から家系を継承することは息子として当然の道理であり、三年の喪と先祖祭祀は「孝」の最大の表現でした。それ故、家を代表する家長は、家系継承のために祭祀と財産を長男に引き継がせ、族譜に家筋や親族関係を明確に記しました。
ここでは、朝鮮時代後期のある家門の生活史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ます。
国立民俗博物館は、韓国国学振興院と共同で「家族」展示を企画し、毎年展示品を入れ替えています。7回目の今回の展示は、「道理を悟り、国を思う:豊山(プンサン)金氏の虚白堂(ホベクタン)・金楊震(キム・ヤンジン)家の物語」です。虚白堂・金楊震(1467‐1535)は、朝鮮王朝第11代・中宗(チュンジョン)の時代に清廉潔白で理想的な官吏として名を馳せ、家門の中興に寄与しました。以降、虚白堂家の人々は、慶尚北道(キョンサンプクト)の安東(アンドン)・奉化(ポンファ)・醴泉(イェチョン)などに住み、心身を磨いてその高潔な人格と学問を基に官職を務め、国のために尽くしました。
こちらに、虚白堂家に代々伝わってきた品が展示されています。最初に紹介する展示品は「幽敬堂(ユギョンダン)扁額」です。この扁額は、金義貞(キム・ウィジョン、1495-1547)が、安東府豊山県五美(オミ)洞で過ごした家の堂号の扁額で、文字は夢人(モンイン)・丁学教(チョン・ハッキョ、1832-1914)によるものです。金義貞は金楊震の息子で、1516年には進士試(成均館入学資格試験、小科)に合格し、1526年に科挙の文科に合格しました。次に紹介するのは『世伝書画帖』です。金楊震の12代後の子孫である金重休(キム・ジュンヒュ、1797-1863)が、家名を上げるために19人の先祖にまつわる31の物語を図版とともに編纂したものです。こちらの絵は、「完営民泣随図」ですが、金楊震が全羅道(チョルラド)の観察使(最高位の地方長官)を務める間に善政を敷いたため、退任の時に地方民らが涙を流しながら見送った姿が描かれています。
最後に、こちらの「金崇祖の紅牌(科挙合格証書)」は、金崇祖(キム・スンジョ、1598-1632)が1629年に科挙の文科において丙科第一人(成績による等級の一つ)として合格したことを示した証書です。朝鮮王朝第16代王の仁祖(インジョ)は、金楊震の曾孫である金大賢(キム・デヒョン)の8人の息子全員が小科(生員と進士を選抜する科挙)に合格し、そのうち5人が文科に合格したことで、村に「五美(オミ)」との名前を授けたと伝わります。
虚白堂家は、先祖の教えを基に、多くの官吏のみならず、日帝強占期に20人余りの独立運動家を輩出した家門でもあります。虚白堂家の物語が、改めて家族の大切さを感じ、家族への愛を実践していただくきっかけになれば幸いです。
これからも、国立民俗博物館では、毎年韓国の名家の家系継承や家族に関する物語を展示していく予定です。
ここまでは、朝鮮時代後期における冠礼から家族の話までをご紹介しました。次に、科挙制度や還暦などについて見てみましょう。
日本語翻訳 河閔恵(ハ・ミンヘ)
翻訳監修 中村克哉(なかむら かつや)